Updates from 8월, 2004 댓글 스레드 토글 전환 | 키보드 단축키

  • August 23, 2004 5:02 pm 퍼머링크 | 응답  

    운을 떼면서 

    1. 경험에 의지하라

    유권자 등록 운동가 아말리아가 한 말이다. 그때 참 많이 찔렸다.

    IWFR에서 금년 9월에 미네소타 FR를 한단다. 그거랑 연결해서 지난 주에 지역 운동가 세미나 비슷하게 뭘 벌였다. 밥도 준다고 해서 따라가 보았더니, 세상에.. 이틀동안 세미나가 있는데 대부분이 유권자 등록에 대한 것이다. 첫 시간은 그래도 좋았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란 상식적이면서도 특정사회이슈에 집중하는 대부분의 단체들은 잘 논하지 않던 주제라던가, “유권자 등록과 소수민족의 정치 파워: 50년 계획” 같은 활동은 신선했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이 젤 첨에 시작하면서 아말리아가 “자, 오늘 모두에게 유익한 하루가 되기 위하여 일련의 원칙에 동의해 봅시다” 하며 제시한 다섯개 원칙이었다. 모 고용주들이 나름대로 기업 정체성 만들기 위하여 그럴 듯한 영어 단어를 조합해서 첫글자로 단어 만드는 것 있잖아. 모 3G라든지, 5E 그런거. 그래서 ROPES라고 respect,, (기억이 안 난다).. 해놓고선 Experience: 경험에 의지한 말을 하자 라고 했는데 이게 참 찔렸다. 기왕 나중에 이견이 있어서 싸울 것이면 논리가 그럴 듯해서 싸우거나 어디서 읽은 것 가지고 다투지 말고 일일 운동 경험에 입각한 자료로 토론을 하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나같은 자봉자들은 참 무례한 불청객이다. 10년 이상 이지역에서 투쟁하고 있던 운동가를 자원해서 도우러 와서 쪼끔 일하다가 대뜸 하는 말이 “요걸 바꾸자”다. 학자들이 노조들은 옛날의 실수를 만회하고 이민자들을 적극 후원해야 될것이다 라고 하면 곧이 곧대로 믿어서 그걸 또 막무내가로 민다. 일은 벌려놓고 책임은 안 지는 형태다.

    경험에 의지한 글. 멀리 못 가지만 해 보긴 해봐야 겠다.

    2. 민족부터 까야겠다

    배운대로 착실하게 민족부터 까야겠다. 안더슨을 괜히 읽었나.

    3. 언어의 탈구조화를 지향

    한국어에선 Black, Negro, African-American, West Indian 이 죄다 “흑인”이다. 지난번에 딴지에서 누가 매트릭스에 대해 쓰면서 Af-Am 교수인 코넬 웨스트를 “아프리카-미국학 교수”으로 소개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African-American Studies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면도 있겠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Af-Am을 아예 미국의 일부로 인식을 하지 않는, 개념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 라티노, 치까노 chicano, 보리꾸아 boricua, 히스패닉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 원주민 (연방 정부를 상대로 법적 주권을 행사할수 있는)과 북미 원주민의 흐릿함도 문제이고. 재작년 오마이에서 “코시안” (korean+asian)이란 개념을 소개한 적도 있었다. 사회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코시안”이란 용어를 채택한 그쪽 ngo 사람들도 딱하지만 (한국이 일본이 다 되려고 하나보다. 지들은 아시아에 있지 않다고 우길려는 꼴을 보니) 거기에 kor 자 하나 들어갔다고 나라가 망한다느니 게시판에서 난 난리는 나중에 따로 보자.

    어디서나 억압받는 계층의 전략이 그렇지만 미국의 인종적 소수그룹들은 사회의 주류적 세계 및 언어관을 흡수하면서 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들에게 들이대어진 창을 거꾸로 돌려 자아 존재를 위한 논리 개발을 진행하여 왔다. 이러한 헤게모니의 내부 판갈이는 억압받으면서 사회 구조의 모순과 주류적 세계관의 불합리함을 직시할수 있는 이들이 이야기할 때 의미가 있는바, 한국에서 인종에 관한 언어적 경직은 미국통 백인들의 입김 말고도 이종차별적 구조의 피해자가 머릿수로 모자라는 것에 인한 것이 아닌가..의심이 된다.

    인종 인식의 다양화와 인종적 hegemonic discourse (이거 많이 써야 하는 표현인데 한글로 어떻게 되는지…) 는 독자적 언어체계를 갖추지 않고선 귀에 귀걸이에 국한되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라티노 정치적 연대 어쩌구 쿠바인 냉전논리의 백인 어쩌구 해도 “남미-갈색피부-이국적 인간들”로 묶어버리는 기존 논리는 충분히 흡수할 역량이 있으며 기껏해야 표현 좀 더 배웠네로 끝나.

    고로 글을 쓰면서 기본 인종에 관한 한국어 단어들은 그 단어가 가리키는 방향이 주류적인 의미일 경우에만 쓰고 나머지는 모조리 영어로 대체하도록 한다. 혹시 한글 단어의 창의적인 응용 및 몽타쥬가 가능할 경우 자주 써서 대체 용어 생활화를 유도하고 (하지만 코시안 같은건 빼고) 정 고까우면 까스떼야노로 도배해 버리기로 한다.

    시작하기엔 충분하군.

     
  • August 19, 2004 5:00 pm 퍼머링크 | 응답  

    [번역보완] – 레죵님의 [허접독해] The pros and const of capital fight 

    [번역보완] – 레죵님의 [허접독해]한 양키의 역사관점에서 본 수도이전
    http://www.mediamob.co.kr/rockdipl/5253.html

    독해 많이 허접; 근데 이걸 꼭 번역해야 할까. 예사처럼 한국을 깔보는 글이군. 그리고 난 WSJ엔 애정도 안 가고. 정치경제를 표방하는 개새끼들.

    he is a much more modest fellow than the pharaohs -> 겸손이 아니라 파라오가 되긴 아무래도 좀 많이 모자란 놈현이 되겠고. has grown quickly thanks largely to grand, state-directed projects, so there ought to be less scepticism than there would be in Europe or North America about a scheme to relocate the entire government administration to the middle of nowhere
    -> 이건 한국은 정부가 앞장서서 삽질을 해온 나라라서 그런지, 확실히 우리 서구 [미국-유럽]과는 많이 다른 똘마니야.. 정부 행정을 통채로 암것도 없는 공터로 옮겨버린데가 되겠음 주: middle of nowhere 는 동부 대도시의 약간 보수적인 부유층이 자기네들보다 약간 더 자유주의적인 중서부 시민들을 깔때 쓰는 용어임 – 미국의 곡창지대가 (그러니까 목장이랑 대규모 농장등) 중서부에 주로 위치했음을 이용.

    Seoul-less
    미국아해들은 seoul을 soul과 똑같이 읽음. soul-less는 영혼을 팔았다, 도 되겠지만 여기선 삽질 정도 되겠다.

    For all the plans to end Seoul’s domination of the rest of the country, it seems unlikely that South Korea’s big industrial and financial firms will decamp to the new capital.
    -> 서울의 헤게모니를 없애려 정부가 지랄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중심지는 여전히 서울에 남을것 같네. [참 안 ‰榮, 동양놈들.]

    As with Canberra, a competition will be held for the best design for South Korea’s as-yet unnamed new capital.
    -> 캔배러의 스텝을 따라서 한국도도 신수도의 [아직 이름도 안 지었으면서.. 짜식들] 공개 설계를 의뢰할것 같아.

    architects … tend to get carried away with grandiose ideas
    -> 설계자들은… 대체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히지

    tend to fly back to their constituencies at the end of each week’s parliamentary sessions, leaving the city half-deserted.
    -> 미국에서 의회는 일년에 서너번 모여서 입법을 해. 그 사이 사이 쉬지. 여름 방학이 제일 길고 (학교를 닮았네?) 그 입법 하는 학기에 해당하는 개념이 parliamentary session 이지. 고로 저 줄은 억지로 간신히 수도를 만들어 놓으면 어차피 의회 쉴때는 정치인들이 자기가 대표하는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서 또 열심히 유세한다. 그러는 사이 폼으로 만들어 놓은 수도는 텅 빈다구 가 되겠음.

    Londoners may be all too aware of the disadvantages of living in a city without a plan, but these cannot be compared with the rival disadvantages of living in a plan without a city ->
    런던은 참 무질서하게 만들어놓은 도시다. 도데체 계획이 없다. 근데, 이걸 바꿔서 계획만 있고 도시는 없으면 [있는 도시가 제 기능을 못하면, 고로 있으나 마나 하면] 진짜 좇돼지 않겠냐? 가 되겠음. though it is no longer Russia’s political capital, it is unquestionably one of the world’s great cultural centres. -> 비꼬는 표현임. 정치적인 기능은 죽었지만 문하 같은거라도 남았으니 쪼끔 다행이네 삘이다.

    야.. 이런 것도 글이냐. 팩트 많이 알아서 좋겠다. 근데 그 정도는 진짜 인터넷 백과에 수도 이전 정도만 키워드로 쳐도 찾아낼수 있는데. 어쩌냐, 나도 두어시간 컴 앞에 앉아서 쓰겠다. 분석이 없는 사실의 나열, ~이겠지, ~하지 않겠나 ~가 아닐까? 하며 남의 의도를 독심술로 읽어내는 상상력, 누런놈들이 뭘 알겠냐, 하지만 백분의 하나는 어느 부분이 무난히 될지도 모르니 기둘리자라는 비틀린 시선. 난 저 단어 묶음을 가리켜 commissioned propaganda라고 부를란다. 누가 커미션 줬겠냐? 저거쓴 기자랑 희희덕거리며 MBA 같이 하다가 야, 요즘 우리 한국에 이런게 있는데 글 함 써볼래해서 그러자 한 놈들이지.

    • 월스트릿이라고 눈치보지 맙시다. 리까르도 Ricardo의 앞장이 노릇이나 하는 엘리트 정치경제 찌라시인 것을.

    ** 영원문은 http://www.economist.com/agenda/PrinterFriendly.cfm?Story_ID=3100713 에 있음

     
  • August 18, 2004 4:59 pm 퍼머링크 | 응답  

    [토론의 사회학] 주제 접근에 대한 간략한 방법론 

    아흐리만의 베복 비판 자격 논쟁의 리플들을 보고 잠깐 들은 생각.

    서론에 내 글 퍼지 말라라고 밝히고 있는데, 적절했다. 난 베복이 누군지도 모르고 DJ DOC도 모른다. 남미 출신이라 한국 가요게에서 가장 최신이라고 귀동냥 해본게 신화 정도다. 하지만 아흐리만의 글은 지금 네이버 쪽에서 이어지고 있는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 있고, 그의 글에 이은 리플들이 이를 입증한다.

    철학쪽 사람들은 현상에 대해 생각을 할때 자주 이를 바탕으로 모델을 만들어서 이론화 시키자라는 유혹에 빠진다. (안 그럼 왜 철학 했겠냐)

    그의 글을 읽어보면, 화두는 소소한 주장에 있지 않고 (예시를 위해 사용되긴 하지만) 다만 구조적 비평, 즉 논쟁이 논리적이지 않고, 논쟁에 대해 돌아오는 답변도 마구잡이이며, 하여간 지켜보기 피곤한 글들이다 라는대에 있다. 좀 생각하며 글을 써라 라는 충고 대용으로도 돼겠다. (내가 철학쪽에 발을 담가봐서 이렇게 읽히나?)

    난 이럴때 저 판에 뛰어들어서 꼭 논쟁의 구조를 합리적으로 개혁해야지 하는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오프의 경우 여럿 이슈에 뛰어들어서 구조적 (process적) 합리성을 부르짖은 적도 많다. 근데 이게 항상 실패다. 토론이 차가워지고, 끝내 사람들이 떠난다. 내 생각엔 원래 비이성적 시간때우기로 특별히 밀어둔 공간이 사람의 정신 건강을 위해 꼭 존재해야 하는 것 같다. 술마시러 가서 하는 토론은 얼굴 붉히며 해야 하고, 욕의 논리로 전개되어도 그게 술자리니까 용납되는 현상.

    모 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게 바로 라칸이 이야기하는 (불가능한) 의사소통 구조의 jouissance (이걸 사전에서 찾아봤는데.. 희열이라? 원래 jouissance도 성적 암시가 담겨저 있는 것인가?), 즉 petit a[utre]가 아닌가.

    근데 여기에 아흐리만이 냉장고 같은 논리학을 가지고 뛰어든게 아닌가. (discouse of the university가 될려나?) 이거, 아무데도 못 간다. 자 리플 보시라. 리플 1: 왜 그리들 싸우냐 짜증나네 / 리플 2: 음악이란거 별건가 / 리플 3: 원 쟁점자들 (네이버에 글을 쓴..)과 베복/DJ 에 대한 인신 공격 / 리플 4: 원 쟁점자들의 논리 복제 (베복이 나쁘다나 어쩌다나..). 이게 죄다 현 논쟁의 내용에 해당한다. 근데 원래 글은 논쟁의 구조를 비판했거등? 맥락 제대로 잡은 이가 없다. 이중 요즘 인기 있는 xx 가 별거냐 라는 마구잡이대중주의자 (리플 2)를 집어서 아흐리만이 다시 자신의 논점으로 끌고 오자 (비평의 방식이 잘못되서 논쟁이란게 욕플로 치달리지 않느냐..라는) 달린 리플이 또다시 4번으로 돌아가는 꼴이다.

    대책 없다. 사람들이 내용에 대해 치고박고 하자고 맘잡고 글을 읽는 한 현 논쟁구조를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는 현 논쟁구조 내에서 재해석 되고, 재배치된다. 그리고 이건 사람들이 인식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요, 현안이 너무 감정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어서 내용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현상으로 특정 토론은 내용만 가지고 논쟁해야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 같다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아흐리만 저 글 네이버에 안 올린것 잘했다. 근데, 미디오 몹에 올려봤자 삽질 밖에 되나. 이건 매체의 한계가 아닌 것 같아. 나 같이 관심 없는 자는 지나가고, 관심 있으면 글의 논점이 안 보이게 인식이 고정되어 있다.

    고로, 글을 제대로 쓰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글은 읽히기 위해 쓰이는 것이다; 현존하는 사회/인식적 틀 속에서 적절한 위치를 못 찾은 글은 정력낭비다.

    그런 의미에서, 내 트랙백의 위치는 뭘까. 안 궁금하다.

     
  • August 18, 2004 12:09 pm 퍼머링크 | 응답  

    민족의 허구와 그 전략적 가치 

    민족주의는 3세계의 국가주의이다.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인류학자들이 매일 같이 고민하는 것은 문화 차이를 어떻게 기술하나 는 것이다. 사람의 인류학이라는 것이 원래 현장에서 케이스를 일일히 연구하며 그 특수성 가우데서 보편성을 도출해내는 바, 사회에서 사람 개인의 삶을 관찰해보면 도데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ㄱ 문화이고 어디까지가 ㄴ 문화인지 참 모호하다. “세계화”된 지금이 아니라 항상 그랬단 말이다. 인류학이 학문으로서 정립된 것은 150년정도 이지만, 어차피 원래 유럽 백인들이 “미지”를 돌아다니며 “미개인”들의 생활을 “관찰”하며 “기록”한것며 “프랑스령 말리의 동남부 지역에 사는 투아렉족은 입으로 악령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고로 걔내들은 미개하다 껄껄”하는 식의 어거지 편견을 연장 한것이니 인식의 도구로써 인류학은 태생부터 문제가 있다 하겠다. 문화란 개인과 개인이 가족 및 그밖의 사회적 테투리 내에서 같이 생활하며 만들어가는 일종의 관습이지 개인을 떠나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해보면 뽀샵 블러 효과 같은 문화 지도가 그려지리라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을 항상 깨는 것이 여행을 해서 멀리 돌아보고 오면 생활양식이라는 것이 무척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다를거야”라는 기대감도 있고 언어 장벽으로 인한 오해, 등등의 겹겹이친 문화본질주의 색안경으로 보는 효과가 있긴 하나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분명 문화적 차이라는 것이 있고 또한 문화적 그룹들은 인종적/지역적 가까움에 기반해서 비슷함을 나타내는 것이 사실이다. 이게 탈근대화 시대의 문화주의이며 인종문화적 민족주의의 이론 기반 되겠다.

    이런 접근에서 놓치게 되는 것은 현재 국가 기반의 문화 평준화라는 것은 후기 식민지화, 그리고 국가 중심의 정치에 의존 및 발전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19세기 신생 백인 국가들의 정체성만들기를 모델로 삼고 있는데 (독일, 미국, 그리고 특이하게도 멕시코..) 이건 국제학에서 허구헌날 하는 소리이며 나도 잘 모르니까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통치 계급이 원래 없던 국가를 만들어내거나 분리하는 과정에서 힘의 기반이 불안정하니까 “우리”의 것이면서도 “타자스러운” 문화 상징들을 (예를 들자면, 미국의 “전통” 문화를 찾아 시골로 민속음악 조사단을 보내지만, 그 농민은 꼭 백인이여야 한다는 것) 발굴해내서 국가의 정체성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국 정체성을 만들고, 범지역적 지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자국 정체성의 우위를 강조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식민지에도 열심히 메트로폴리의 부성 관계를 사상으로 주입시키는 배경에서 3세계 국가들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독립하고 보니 자본은 철수하고, 언론은 비웃으며, 부하들은 냉전 구도 뇌물의 유혹을 받는데서 3세계 지도자들 위기를 느끼게 되는데 이를 타파한다고 나온게 메트로의 논리를 자국에 맞게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 논리가 “반투족 영광의 재건”이라든지 (콩고), “우린 원래 단일민족이었다”든가 (남한), “우린 오랜 전통의 ‘진짜’ 문화가 있다”등등 (쿠바) 다양하면서도 규칙을 하나 찾을수 있다. 그것은 신 독립 국경내의 사람들을 훑어보아, 공유점을 최대한 확장시킨 후 한가지 특징을 애써 강조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특성상 “이것이 우리 민족이다”라고 거론되는 것은 상호 보전적인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서 언급한 핵심 민족특성은 끝까지 사수된다. “한국인은 삭은 맛을 즐긴다”, “콩고인은 부지런하다”등 부수적 특성은 예외가 허용되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상상된 단일 민족 공동체의 개념을 부정하는 무리와 긍정하는 무리의 골은 깊다. 그 예는 딴지 관광청에 파토의 글 “민족주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 (http://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_no=59&u=2&code=)에 달린 리플에서 확실히 볼수 있다.

    전제 했듯이 나는 문화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매 순간 만들어지고 수정되어지는 행동 습관의 친숙해짐으로 보고 그 테투리를 벗어나는, 국가 규모의 언론을 동원한 “국민”이나 “국민의 정서”의 형성에 대해선 우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파토님의 글을 읽고 “이 정도의 발언이라도 영향력있는 문으로 나왔으니 다행”이라고 생각 했지만 그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글 끝에 꼬리를 붙여서 “백인이면 다 미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꿔야 겠다”라고 썼는데, 난 “백인-> 미국” 뿐만 아니라 “미국->백인”이란 것도 과감히 바꿔야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국내 시민 people of color 가 30 퍼센트이며, 이들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 것이 이십년 남짓 남았는데 언제까지 “미국인”은 백인이며 비백인은 “이민자”가 되어야 하겠는가? 숫자만으로 논리를 만드는 것이 위험한 줄 아나, 요즘 미국에 대한 인식은 이 수준이면 참 한심하게 되었다.

    마무리는 미래의 어느 글로 기약하고 이쯤에서 다음 으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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