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인종주의 그리고 차별

  • 누가 여성주의를 비난하는가

    이성애규정화 체제에서 Intersex에 속하지 않고 살아남은 주류 남자로서의 사회역사적 특권을 나름대로 이용해 펨님의 “Minor로서의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지원사격을 보냅니다.

    전제

    역사는, 그리고 사회는 항상 주류/기득권층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존재해 왔다. 이들은 남성/이성애/백인/부르주아/비장애인/국적/언어능력/종교 등의 사회 인식 틀의 중심에 자신들을 위치 시키며 이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끝없는 비인간화 [otherization]과 차별로 대해 왔다.
    여성주의 이론은 근대화 초기의 여성주의 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사회적 차별의 틀을 해체하고 이념제 연대의 토대를 마련했다.

    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계급을 비롯한 특권적 차이점들은 근근히 모든 저항 시도를 비판하는 손쉬운 도구로 쓰여졌다는 것.

    이 전제를 비판하시려면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든가. 욕플을 달던가. “너 같은 놈은 여성주의자에게 매달려서 받아먹으려는 얌체족이지”라고 몰던가. 알아서 하세요.

    딱 두가지만 지적하자면,

    역차별이라니, 될 소리를 하시라. 미국 공화당에는 인종무효론에 기반한 정책 [color blind policy]이 있습니다. 200년동안 충분히 착취했으니 이제 부턴 공평한 사회를 열어가며 인종은 원래 만들어진 개념이란 것을 인지하며 살자는 취지. 그런데 백인의 관점에서 참 즐거운 것이 이제부터 공평해진 것이진 것이니 흑인들에게 대해 괜한 원죄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이제 흑인에게 구조적으로 임금을 덜 주거나 언어적으로 폭행하는 일이 있어도 공평한 사회이므로 그런 일들은 경제구조로 설명 내지는 합리화가 된다는 것이죠. 참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광주 학살은 어차피 그때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정치적 선택을 통해 쌓아올린 미국의 부는 근면한 국민 정체성의 결과라죠. 이러한 한쪽만 맘편한 공평제도를 비판하니, 왜 옛날의 나빳던 인종 개념을 다시 가져오냐, 너 인종차별하냐 라는 한심한 소리를 듣습니다. 여성문제도 똑같습니다. 50년 외세에 의한 수탈의 역사를 시장논리로 받아들이시렵니까, 아니면 남성의 뿌리깊은 특권구조에 대해서 생각해보시렵니까?

    주둥아리 좀 닥칩시다. 여성주의는 남성들이 이에 대해서 옳냐 그르냐 왈가불가 하자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저항 운동의 시발점은 억압된 사람들이 마음을 놓고 문제를 토론할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흑인들이 체제에 대해 분노를 토해도 총에 맞아죽지 않을 환경부터 마련하자는 것이죠. 오웬님이 [통념적으로 인정되는]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鍮摸?纛?자치권에 촛점을 맞춘 페미니즘의 글을 쓰자 마자 우후죽순으로 달리는 적의적인 글은 여성주의 운동에 있어 이러한 공간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성이 어쩌네 여성주의가 어쩌네 하는 남성끼리의 담론 구조내 여성을 사물화 하여 입을 꽁꽁 묶는 것이죠.

    고로 남성들. 할 말 많다는 것 이해하겠습니다. 몇천년의 세월이 우리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일까요? 다같이 입 좀 닥칩시다. 조건부를 달기 전에 상대편을 읽고,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억압적 순환구조의 역흐름으로 내딧는 첫 걸음입니다.

    용호

    연관된 글: (그리고 이 글 쓴 분들은 서로 서로 트랙백 좀 쓰시면 읽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거라는…)

    오웬, 행복한 페미니즘
    노바리, 페미니즘?
    永革, 여성주의와 맑스, 그리고 나
    노바리, 군대와 페미니즘?

  • 라띠노, 히스패닉, 치까노

    글 보정

    간만에 친구랑 카페에 갔다가 프레스콧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되었어요. 이년 전에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수강하며 읽은 글이었는데.. 얘가 느닷없이 프레스콧 패러다임.. 남미 인종의 열등성이 아니라 스페인 제국이 망하고 있다는 이론이었어. 하구 바로 고쳐주더라고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스페인 제국 이야기도 있었고 아무래도 걔 말이 맞는 것 같다는 T.T 다시 프린트해서 읽을 여력도 없구.. 이에 고칩니다. 청교도/카톨릭 – 앵글로색슨/라틴계통의 인종적 비교는 시대의 담론(지금도 건재한)이었지만 프레스콧 패러다임은 아닙니다.

    2004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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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부터 였는지 미통계청이 (Census Bureau 가 통계청 맞나 모르겠다) 2000년 인구조사 결과 중 히스패닉으로 표시되어 있던 것을 “히스패닉 또는 라티노” 표시해놓았어요 [참고 문헌 은 Overview of Race and Hispanic Origin]. 정확한 표기는 “히스패틱 또는 라티노, 비 백인”[Hispanic or Latino, non white] 이 되겠네요.

    이 표현에 들어 있는 정치 역학으로 글을 풀어보려 합니다. 이중 많은 부분이 미국라티노학 [U.S. Latina/o Studies]의 핵심주장 재탕이란 것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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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ace, American Studies, Black

    기억나는 대로 장면들 몽따즈

    1. 손바닥. 대학 1학년이 되었을때.. 아프리카 (아프리카인을 의미하는 African 과 미국내 흑인을 의미하는 African-American은 정치언어적으로 훨 다릅니다)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깜짝 놀랐다. 이 친구는 동남부에서 와서 반투족 특성이 강하고 – 키크고 피부가 아주 검은 – 아마 우간다 쯤에서 왔을 것이다. 근데, 얘의 손바닥은 나랑 똑같은 분홍오렌지색이었다. 깜짝 놀란 나 왈, “손바닥 피부 색깔이 다르네”. “응, 몰랐냐”. “첨본다”. “흑인 첨보냐”. “응, 흑인을 본 적이 없다”. 친구, 슬쩍 웃더니, “말 조심해라.. 그런말 크게 했다가는 혼난다”.

    주:
    ㄱ. 한국 사회 구도 책은 참 친절도 하다. 세계지도에 여러 인종들을 표시해주곤 “얘내들은 더 검은 흑인”, “얘내들은 아랍”, 얘내들은 백인 등등 사진을 보여준다. 도감도 처럼.
    ㄴ. 실제로 흑인을 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 나오는 흑인은 주로 몇 씬 나오다가 죽는다. 주인공이 되는 경우도 그리 없다.
    ㄷ. 내가 온 국가도 피부 톤이 옅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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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헤게모니 세력들의 유기적 결합

    술이부작님의 “정치와 경제의 민주적 통제” 에 트랙백 합니다. 전 이렇게 꼭 집어주는 글이 제일 좋습니다 ^^

    답하는 것이 젤 쉬우니까, 우선 답부터 하구, 그리고 한번 들어본 가능성있는 반자본주의 대안을 제시해보겠습니다.

    우선 “결론만 다를뿐 두 글 다 [정치상의 민주주의는 경제사회주의를 이끌어낸다] 라는 전제에 동의한다” 라는 님의 분석에 반대 의견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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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술경제, 정치구조, 그리고 Julian Steward

    Svinna 님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 동일해 보이는 필연성에 배팅하기 ” 에 트랙백 합니다.

    아주 단순한 듯 하면서 생각해보지도, 읽어보지도 못 한 이야기이이다. 걍 옛날 옛적에 반박되어서 다시는 살아남지 못한 담론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우선 시장우선자본주의 + 민주주의 논리는 “시장”의 선택이란 것이 수많은 개인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서 만드는 것이라고 출발한다. 개인 A가 1에 해당하는 경제적 행동을 취하고, 개인 B가 -2에 해당하는 경제활동을 하면 거시적인 시장의 행동은 -0.5 이므로, 개인들의 서로 배치되는 행동을 조합했음로, 민주적이다, 하는 것이 논지이죠. 모, 좀 간단한 대답이긴 합니다만 계산하기 좋아하고 논쟁은 질색인 경제학부도들이 즐겨 써먹는 수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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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을 떼면서

    1. 경험에 의지하라

    유권자 등록 운동가 아말리아가 한 말이다. 그때 참 많이 찔렸다.

    IWFR에서 금년 9월에 미네소타 FR를 한단다. 그거랑 연결해서 지난 주에 지역 운동가 세미나 비슷하게 뭘 벌였다. 밥도 준다고 해서 따라가 보았더니, 세상에.. 이틀동안 세미나가 있는데 대부분이 유권자 등록에 대한 것이다. 첫 시간은 그래도 좋았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란 상식적이면서도 특정사회이슈에 집중하는 대부분의 단체들은 잘 논하지 않던 주제라던가, “유권자 등록과 소수민족의 정치 파워: 50년 계획” 같은 활동은 신선했다. 제일 인상 깊은 부분이 젤 첨에 시작하면서 아말리아가 “자, 오늘 모두에게 유익한 하루가 되기 위하여 일련의 원칙에 동의해 봅시다” 하며 제시한 다섯개 원칙이었다. 모 고용주들이 나름대로 기업 정체성 만들기 위하여 그럴 듯한 영어 단어를 조합해서 첫글자로 단어 만드는 것 있잖아. 모 3G라든지, 5E 그런거. 그래서 ROPES라고 respect,, (기억이 안 난다).. 해놓고선 Experience: 경험에 의지한 말을 하자 라고 했는데 이게 참 찔렸다. 기왕 나중에 이견이 있어서 싸울 것이면 논리가 그럴 듯해서 싸우거나 어디서 읽은 것 가지고 다투지 말고 일일 운동 경험에 입각한 자료로 토론을 하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나같은 자봉자들은 참 무례한 불청객이다. 10년 이상 이지역에서 투쟁하고 있던 운동가를 자원해서 도우러 와서 쪼끔 일하다가 대뜸 하는 말이 “요걸 바꾸자”다. 학자들이 노조들은 옛날의 실수를 만회하고 이민자들을 적극 후원해야 될것이다 라고 하면 곧이 곧대로 믿어서 그걸 또 막무내가로 민다. 일은 벌려놓고 책임은 안 지는 형태다.

    경험에 의지한 글. 멀리 못 가지만 해 보긴 해봐야 겠다.

    2. 민족부터 까야겠다

    배운대로 착실하게 민족부터 까야겠다. 안더슨을 괜히 읽었나.

    3. 언어의 탈구조화를 지향

    한국어에선 Black, Negro, African-American, West Indian 이 죄다 “흑인”이다. 지난번에 딴지에서 누가 매트릭스에 대해 쓰면서 Af-Am 교수인 코넬 웨스트를 “아프리카-미국학 교수”으로 소개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African-American Studies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면도 있겠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Af-Am을 아예 미국의 일부로 인식을 하지 않는, 개념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 라티노, 치까노 chicano, 보리꾸아 boricua, 히스패닉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 원주민 (연방 정부를 상대로 법적 주권을 행사할수 있는)과 북미 원주민의 흐릿함도 문제이고. 재작년 오마이에서 “코시안” (korean+asian)이란 개념을 소개한 적도 있었다. 사회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코시안”이란 용어를 채택한 그쪽 ngo 사람들도 딱하지만 (한국이 일본이 다 되려고 하나보다. 지들은 아시아에 있지 않다고 우길려는 꼴을 보니) 거기에 kor 자 하나 들어갔다고 나라가 망한다느니 게시판에서 난 난리는 나중에 따로 보자.

    어디서나 억압받는 계층의 전략이 그렇지만 미국의 인종적 소수그룹들은 사회의 주류적 세계 및 언어관을 흡수하면서 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들에게 들이대어진 창을 거꾸로 돌려 자아 존재를 위한 논리 개발을 진행하여 왔다. 이러한 헤게모니의 내부 판갈이는 억압받으면서 사회 구조의 모순과 주류적 세계관의 불합리함을 직시할수 있는 이들이 이야기할 때 의미가 있는바, 한국에서 인종에 관한 언어적 경직은 미국통 백인들의 입김 말고도 이종차별적 구조의 피해자가 머릿수로 모자라는 것에 인한 것이 아닌가..의심이 된다.

    인종 인식의 다양화와 인종적 hegemonic discourse (이거 많이 써야 하는 표현인데 한글로 어떻게 되는지…) 는 독자적 언어체계를 갖추지 않고선 귀에 귀걸이에 국한되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라티노 정치적 연대 어쩌구 쿠바인 냉전논리의 백인 어쩌구 해도 “남미-갈색피부-이국적 인간들”로 묶어버리는 기존 논리는 충분히 흡수할 역량이 있으며 기껏해야 표현 좀 더 배웠네로 끝나.

    고로 글을 쓰면서 기본 인종에 관한 한국어 단어들은 그 단어가 가리키는 방향이 주류적인 의미일 경우에만 쓰고 나머지는 모조리 영어로 대체하도록 한다. 혹시 한글 단어의 창의적인 응용 및 몽타쥬가 가능할 경우 자주 써서 대체 용어 생활화를 유도하고 (하지만 코시안 같은건 빼고) 정 고까우면 까스떼야노로 도배해 버리기로 한다.

    시작하기엔 충분하군.

  • 민족의 허구와 그 전략적 가치

    민족주의는 3세계의 국가주의이다.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인류학자들이 매일 같이 고민하는 것은 문화 차이를 어떻게 기술하나 는 것이다. 사람의 인류학이라는 것이 원래 현장에서 케이스를 일일히 연구하며 그 특수성 가우데서 보편성을 도출해내는 바, 사회에서 사람 개인의 삶을 관찰해보면 도데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ㄱ 문화이고 어디까지가 ㄴ 문화인지 참 모호하다. “세계화”된 지금이 아니라 항상 그랬단 말이다. 인류학이 학문으로서 정립된 것은 150년정도 이지만, 어차피 원래 유럽 백인들이 “미지”를 돌아다니며 “미개인”들의 생활을 “관찰”하며 “기록”한것며 “프랑스령 말리의 동남부 지역에 사는 투아렉족은 입으로 악령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고로 걔내들은 미개하다 껄껄”하는 식의 어거지 편견을 연장 한것이니 인식의 도구로써 인류학은 태생부터 문제가 있다 하겠다. 문화란 개인과 개인이 가족 및 그밖의 사회적 테투리 내에서 같이 생활하며 만들어가는 일종의 관습이지 개인을 떠나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해보면 뽀샵 블러 효과 같은 문화 지도가 그려지리라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을 항상 깨는 것이 여행을 해서 멀리 돌아보고 오면 생활양식이라는 것이 무척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다를거야”라는 기대감도 있고 언어 장벽으로 인한 오해, 등등의 겹겹이친 문화본질주의 색안경으로 보는 효과가 있긴 하나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분명 문화적 차이라는 것이 있고 또한 문화적 그룹들은 인종적/지역적 가까움에 기반해서 비슷함을 나타내는 것이 사실이다. 이게 탈근대화 시대의 문화주의이며 인종문화적 민족주의의 이론 기반 되겠다.

    이런 접근에서 놓치게 되는 것은 현재 국가 기반의 문화 평준화라는 것은 후기 식민지화, 그리고 국가 중심의 정치에 의존 및 발전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19세기 신생 백인 국가들의 정체성만들기를 모델로 삼고 있는데 (독일, 미국, 그리고 특이하게도 멕시코..) 이건 국제학에서 허구헌날 하는 소리이며 나도 잘 모르니까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통치 계급이 원래 없던 국가를 만들어내거나 분리하는 과정에서 힘의 기반이 불안정하니까 “우리”의 것이면서도 “타자스러운” 문화 상징들을 (예를 들자면, 미국의 “전통” 문화를 찾아 시골로 민속음악 조사단을 보내지만, 그 농민은 꼭 백인이여야 한다는 것) 발굴해내서 국가의 정체성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국 정체성을 만들고, 범지역적 지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자국 정체성의 우위를 강조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식민지에도 열심히 메트로폴리의 부성 관계를 사상으로 주입시키는 배경에서 3세계 국가들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독립하고 보니 자본은 철수하고, 언론은 비웃으며, 부하들은 냉전 구도 뇌물의 유혹을 받는데서 3세계 지도자들 위기를 느끼게 되는데 이를 타파한다고 나온게 메트로의 논리를 자국에 맞게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그 논리가 “반투족 영광의 재건”이라든지 (콩고), “우린 원래 단일민족이었다”든가 (남한), “우린 오랜 전통의 ‘진짜’ 문화가 있다”등등 (쿠바) 다양하면서도 규칙을 하나 찾을수 있다. 그것은 신 독립 국경내의 사람들을 훑어보아, 공유점을 최대한 확장시킨 후 한가지 특징을 애써 강조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특성상 “이것이 우리 민족이다”라고 거론되는 것은 상호 보전적인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서 언급한 핵심 민족특성은 끝까지 사수된다. “한국인은 삭은 맛을 즐긴다”, “콩고인은 부지런하다”등 부수적 특성은 예외가 허용되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상상된 단일 민족 공동체의 개념을 부정하는 무리와 긍정하는 무리의 골은 깊다. 그 예는 딴지 관광청에 파토의 글 “민족주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 (http://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_no=59&u=2&code=)에 달린 리플에서 확실히 볼수 있다.

    전제 했듯이 나는 문화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매 순간 만들어지고 수정되어지는 행동 습관의 친숙해짐으로 보고 그 테투리를 벗어나는, 국가 규모의 언론을 동원한 “국민”이나 “국민의 정서”의 형성에 대해선 우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파토님의 글을 읽고 “이 정도의 발언이라도 영향력있는 문으로 나왔으니 다행”이라고 생각 했지만 그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글 끝에 꼬리를 붙여서 “백인이면 다 미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꿔야 겠다”라고 썼는데, 난 “백인-> 미국” 뿐만 아니라 “미국->백인”이란 것도 과감히 바꿔야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국내 시민 people of color 가 30 퍼센트이며, 이들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 것이 이십년 남짓 남았는데 언제까지 “미국인”은 백인이며 비백인은 “이민자”가 되어야 하겠는가? 숫자만으로 논리를 만드는 것이 위험한 줄 아나, 요즘 미국에 대한 인식은 이 수준이면 참 한심하게 되었다.

    마무리는 미래의 어느 글로 기약하고 이쯤에서 다음 으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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