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essays

  • 언어 구사자 변화율, 흐름에 역행하는 나성 거주 아시아계

    의뢰받은 소규모 연구 때문에 요즘은 인구 통계 보며 놀고 있다.

    Language Spoken at Home: Persons 5 Years of Age and Older. Los Angeles County, 2000 Census

    언어 / 5살-17살 / 18살 이상
    Spanish or Spanish Creole / 47.34% / 35.23%
    Korean / 1.55% / 1.97%

    스페인어는 17살이 지나면서 구사인원이 12% 떨어진다. 말이 12%이지 내부적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25% 가량 떨어지는 것임으로 이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국가주의적 단체들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조금 가기도 한다.

    웃긴것은 한족어는 오히려 성인이 되면서 구사인원이 급증 (내부적으로는 33% 증가)한다는 것이다. 더 특이한 것은 이것이 아시아 계열 언어 (인구 절대치의 1%가 넘는 언어로 보자면 아르메니아어, 중국어, 따갈로그어) 일반에서 광범위하게 보여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Speak only English 41.37% / 47.14%

    영어 모노언어 구사자가 6%나 늘어나는 대세를 감안해본다면 이는 분명 흐름에 역행하는 현상인데 말이다.

  • 대한민국 그리고 아메리카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지니는 어감을 감지했다. “아메리카” 라고 하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응용해보자.

    대한민주주의인도네시아국민
    대한민타이국인
    “나도 대한민국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대한민국이다.

    Immigrants are America

    난리나겠는걸?

  • 기술반란: 이채와 언니들+블로그

    (한달전에 시작한 글, 이제야 나름대로 마무리)

    ichae1982.com

    이채. 언냐들 프로젝트를 구경하다가 달군님 블로그 (몇 주전에 여기 왔는데 이게 언냐들 프로젝트인줄 알았음. 저걸 어디서 봤더라? 가디록님이 소개한 곳이 아니던가? 음.. 하튼 ) 에서 링크보곤 찾아가보았는데, 놀랐다. 디자인만으로도 저렇게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을.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게 아니라, 달군님의 요 이야기에 대한 감상이다. 약간 연관은 된다.

    블로걸, 본격시작! 시작멤버 모집
    blog.jinbo.net/dalgun/?pid=330

    사회 소수가 주체가 되어 계획을 진행하다 보면 차질이 많길 마련이다. 특히, 교육. 체계적으로 제도에서 소외된 이들이 일을 하면 숙련된 일손이 모자라게 된다. 한달이나 묵은 글이라서 좀 계속 논지를 펴는 것이 뭐하지만, 예전에 보았을땐 부족한 점이 많았다. 토론이 촛점이 안 맞고 진행되는 것 같았고, 언냐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에 있어서 여러 기술해결패케지를 토의하는데 다른 이런 것도 논의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잇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지님과 달군님을 가볍게 보았다가는 큰코다칠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지만 여튼 첫 인상은 그랬다.

    그떄 뛰어들어서 “지지하는 아무개인데요 요런 방식을 도입하면 어떨까요”라고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소수가 주축이 되어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저항운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회변화는 일정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표를 향해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시행착오, 맺어지는 인맥 및 사회인프라 양성, 변화에 대한 외부의 인식등 다방면에서 동시로 여러 차원의 변화가 끊임없이 생기게 된다. 에, 적어도 Rachleff 교수는 그렇다고 한다.

    Tricia Rose 교수는 Black Noise (1997) 라는 저서에서 흑인 기술공 (남성이 주축이 되는)들의, 힙합 문화에서의 공로를 이렇게 해석한다: “백인 사회에 가장 싸게 숙련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러면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이들 기술자들은 일단 경제적인 기반을 잡고는 힙합 문화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음악기술실력을 이용해 흑인전통의 연장선에 있는 R&B 및 컨츄리음악을 리믹스하는가 하면 노동 출력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공업용 기계를 분해해서 새로운 소리를 내는 기계를 즉석에서 만들기도 한다. 특히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응용하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전기전달이 주목적인 코일을 꼬아서 저음을 내는 것이 그 중 하나. (탈산업화된의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재료를 구하기가 상당히 쉽다) 로즈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이 “주인”을 위해 교육된 기술을 역이용하는, 기술반란 (이러한 용어가 로즈의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이라고 지칭한다.

    언니들 프로젝트는 남성위주의 첨단기술산업에서 암약하고 있던 여성들이 체제 내부에서 점진적으로 자주적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종의 점진적 기술반란/혁명이 아닌가. 이미 잘 나가고 있는 어딘가의 페메니즘 블로그의 운영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because blogs are not just boys toys”. (정확한지 모름) 늘상 그렇듯이 혁명은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추가 잡담. 이리 저리 글을 뒤지다 보니 요런 글도 발견했다. 기분이 좋다.
    TATTING 시작 hypercortex.net/tt/index.php?pl=2&ct1=-1 中

    덧글)
    해외의 여성 사이버액티비스트들은 Networking을 이미지로 형상화할 때, Weaving 이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쨌든 난 Tatting보다는 Weaving이 좋다.)

    여성의 노동이지요. 혼란기중에도 사회를 지탱하는 여성의 노동. 흐흐. 설마 테터도 그러한 시각으로 작명되었을까요?

  • [자료] 이런 저런 자료들

    이런 저런 글 모음

    임지연. 미국의 민권 운동에 미친 냉전의 영향, 1945-1960
    americanhistory.or.kr/19-3.pdf

    cynicult. 미국에서 아시아 남성의 존재는? 윌리엄 헝과 인종주의
    php.chol.com/~cynicult/tt/index.php?pl=43


    임지연. 미국의 민권 운동에 미친 냉전의 영향, 1945-1960
    K. J. Am. Hist. 19 (2004), 51-77
    americanhistory.or.kr/19-3.pdf

    *주제어(Keywords): 냉전(cold war),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 대외 관계(foreign relations),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 리틀락 사건(Little Rockcrisis).

    소련이 이 때 미국의 인종 차별 사건들을 공산주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게된 것은 냉전 구도에서는 당연한 이치였다. 『트루드(Trud)』(전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기관지)는 먼로 린치 사건 등 남부 주에서 벌어진 흑인 린치 사건들을상술하면서 남부에서 흑인은 반노예와 같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10)또, 『프라우다(Pravda)』(구소련 공산당 중앙기관지)는, 타민족 억압이 제국주의의 기본 요소였듯이, 인종 차별은 자본주의의 필수적 요소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헌법은 모든 시민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했지만 흑인들은 실상 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프라우다는 흑인들이 백인과 분리된 학교에 다녀야 하고, 백인과 같이 공공 시설을 쓰는 것이 금지되는 등 분리 차별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남부 주가 몇 군데나 되는지를 인용하며 이와 같은 주장을납득시키려 하였다. 이에서 볼 수 있듯이 오직 소련만이 진정한 자유, 독립, 평등을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11)모스크바의 미국 대사관은소련이 미국의 인종 문제를 선전 무기로 사용하는 경향의 심각성에 대해 보고했다. 1940년대 후반에 이르면 미국의 흑인 문제는 소련의 선전 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
    아이띠 대사는 불만을 표시하며 아이티 정부가 이후 미국에서 열리는 모든회의에 참석을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아이티의 미국 대사는 사과하면서, 비정부 조직으로부터의 초대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국무부와 접촉해야한다고 조언했다.16)국무부는 미국을 방문한 해외 인사들에 대한 이같은 처우가대외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은냉전기 소련과의 대립 관계에서 미국이 반드시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제3세계 국가의 인사들이었던 것이다
    (…….)
    INP [International Press and Publication Division]는 흑인의 성공 사례를 요약한 『흑인 기록(Negro Notes)』같은 소책자나 인종 문제를 다룬 영화 필름을 제공했는데, 이런 영화들 안에서 흑인과 백인은 함께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USIS는 흑인을 다룬 책이나 신문, 언론 기사 등을 모으는 작업을 펼쳤는데, 이 기사들의 대부분은 흑인의 입지 상승을
    ……….
    인도인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이며 미국의 다른 나라에 대한 원조도 제국주의의 도구 이상은 아니라고여겼다.25)또 그들은 미국 대사관에 흑인이 별로 없다는 사실로부터도 인종 차별의 증거를 찾아내려고 했다. 이 점은 인도 대사인 체스터 보울스(Chester Bowles)가 특히 강조해 왔던 것이었다. 그는 측근이나 국무부 관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거듭 인종 문제가 해외에서 미국의 이미지를 해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흑인 외교관의 채용을 추천해 왔다. 그는인도인이 흑인 관리를 더 허물없게 대하기도 하거니와 흑인 외교관을 채용하면인도인이 미국의 흑인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좋지 않은 감정을 없애는 데에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것 참조:

    Manning Marable. How Capitalism underdeveloped Black America: Problems in Race, Political Economy and Society.

    Cedric J. Robinson. Black Marxism: The Marking of the Black Radical Tradition.
    Foreword by Robin D. G. Kelley

    글고

    Frank Wilderson. suture@uclink4.berkeley.edu
    The Indifference of Marxism to the Black Subject

    .

    cynicult . 미국에서 아시아 남성의 존재는? 윌리엄 헝과 인종주의
    php.chol.com/~cynicult/tt/index.php?pl=43
    04/07/06 08:48

    한 컬럼니스트는 그를 제2의 삼보(Sambo)로 정의하며, 그의 명성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의 개념을 훨씬 넘어서는, 오늘날 도저히 있어선 안되는 racism의 현현으로 보고있다. (삼보를 비롯해 두꺼운 입술에 새까만 얼굴, 백치같이 웃으며 수박을 들고 있는 흑인광대 이미지들은 스파이크 리가 [Bamboozled]를 통해서 모욕적인 인종차별역사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강조했다. 그리고 [판타스틱 소녀백서]에서 파란을 일으킨 KOON 치킨 포스터의 로고로 사용된 희화화되고 스테레오타입화된 흑인의 얼굴 또한 동일한 맥락 내에 있다.) 게다가, 윌리엄 헝은 만화나 쇼의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인물이기 때문에 그 부정적 효과가 더욱 크다는 것.
    (……….)
    윌리엄 헝은 공교롭게도 미국인들이 가진 스테레오타입화된 아시아 남성의 이미지, 그 중에서도 가장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이미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우선 외모. 찢어진 눈에 튀어나온 앞니, 장작깨비같은 몸매에 촌스러운 옷차림, 이상한 영어 액센트, 버클리 공학도라 더 강화되는 (수학이나 컴퓨터만 잘하는 아시아인?) nerd 이미지 등.

    => 주류적 코드의 문화읽기 냄새가 나는데?

    Janine Young Kim. Are Asians black? The Asian-American civil rights agenda and the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the black/white paradigm. Yale Law Journal, June 1999 v108 p2385-2412

十三人의여성이흥분해서빨아준다하오.
(장소는백인이우글거리는술집이므훗하오.)

第一의남성이추하다고그리오.
第二의남성도추하다고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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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人의햏자는발기한남성과추한여성과그러케뿐이모혓소.
(다른디카샷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남성이발기하더라도좃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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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中에二人의남성이백인이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남성이백인이라도좃소.

(장소는남조선풍습에서동떨어진술집이라도므훗하오.)
十三人의여성이흥분해서빨아주지아니하야도좃소.
十三人의여성이흥분해서빤다하오.

  • [펌] 검둥이 강아지. 섹스파티 관련 질문.

    훗. 논쟁에는 관심없는데 내가 대답한 부분이 (;;) 상당히 흥미롭다. 그에 대한 검둥이 강아지님의 반응도 눈여겨 볼만. 내 맘대로 줄 쫙쫙. 원래 포스트는 지워지구 이 논쟁은 검둥이강아지님이 [음란파티에 관한 생각.] 으로 옮겨 갔음. http://www.mediamob.co.kr/sun21849/32472.html

    섹스파티 관련 질문. | 2005-01-15 오후
    검둥이 강아지

    포스트 주소 : http://www.mediamob.co.kr/sun21849/32459.html (지워짐)

    유학중인 분들 있나요?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유학중이거나 유학 경험있는 분들 글을 보시면 댓글 달아 주십시오.

    만약에 한국 유학생 약 20명이 모여서 현지 여자들과 섹스파티를 하고 그것을 유학생 사이트에 올리면서 현지 여자와 즐기는 방법을 소개하기도 하고 초등학생이나 중학t생과 즐기는 방법 등의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현지인들이 알게 되면 그 사람들 반응은 어떨 것 같나요?

    이 포스트는 정보수집을 위한 것이니 오늘 안으로 지울 예정입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ww.mediamob.co.kr/sun21849/post/tb.asp?PKId=32459
    (더 보기…)

  • hybrid 가 어우름이라..

    mcfrog. 블로그(blog)를 대신할 우리말
    http://mcfrog.cafe24.com/tt/index.php?pl=241

    흠.. 저게 내가 생각하는 혼합주의일까.

  • 인종차별과 인종편견은 다릅니다

    산하님의 “인종주의 2중대” 에서, 의도는 존중하면서도 의식은 껄끄러워 딴전을 슬그머니 제기해봅니다

    넉달전에 목격했던 예를 제시하고 들어가자면

    공간은 목요일 오후, “적당히” 자유주의적인 중서부 주 대도시에서 유색인/이민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1.25 짜리 버스. 대부분이 소말리아 이민/미국 흑인이고 전 피부톤을 좀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것에 협조하러 타곤 꾸벅 꾸벅 조는 중이었는데

    백인 1 (편의상 “철수”): 야 근데 요즘 정치적 올바름이 남용되서 참 골치가 아퍼
    백인 2 (편의상 “털보”): 흠 그치
    철수: 아니 내가 여기 갈아 타기 전에 5번 정거장에서 기다리는데 왠 난데없는 소말리아 아해가 날 보고는 싫어하는 거야.. 제국주의 양키놈, 너 땜에 우리 나라가 이 꼴이고 우리가 다 너네 나라에 피난 왔어 뭐 이러면서..
    털보: 허 그참.. 개념없는 이민자군
    철수: 아니 나도 나름대로 자유주의적 이상이 있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데 얘는 왜 나를 미국 정부와 싸잡아서 욕하냐 말야. 그래서 “불만이면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쏘아붙여주었지.
    털보: 오호
    철수: 그 친구는 금새 조용해졌는데.. 옆에 있는 또 다른 백인이 나보고 “그대는 지금 증오 행위를 [hate speech] 하셨소” 하는 거야 기가 막혀서
    털보: 그런 급진 친구들이 울 나라에 많아진다면 골치가 아플 거야
    철수: 아니 방금 소말리아 친구가 내게 한 소리는 뭔데!
    털보: 우리가 참아야지.. 결국엔 그네들도 교육을 받으면 깨닫지 않겠나

    제 견해로는 철수의 행위는 인종차별이며 증오 행위 맞습니다. 소말리아 이민자가 [편의상 하삼] 한 말은 인종차별과 전제를 공유하는 편견행위는 맞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차별을 휘두를 사회적 힘은 없는 깨갱거림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다툼이 크게 발전되 주먹을 휘두루는 사건으로 발전된다면 경찰이 몰려오고 십중팔구 철수는 앰뷸런스, 하삼은 경찰에 붙잡淺?신분증 요구 부터 받는 것이 일반 현상입니다. 하삼이 인종편견적 발언을 아무리 해도 그 편견을 물질화 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으니 철수는 이 말다툼이 편안하고 짜증나는 정도에서 그칩니다. 하삼의 경우는 어떤가요? 철수가 열받아서 “자넬 명예홰손으로 고소하겠다” 하면 “그래보시게, 이건 내 변호사 연락처구” 할 법 지식, 사회 여력이 안 됩니다.

    미리 용어를 정리하자면

    인종주의 – 인종적 특성이 있다고 보는 이념
    인종편견 – 타 인종에게 부정적 특성을 부여함
    인종차별 – 편견을 억압/착취등으로 현실화함

    사회 여건상 철수의 인종차별적 발언과 하삼의 인종편견적 발언을 동일 선상에 놓고 “하삼, 보니까 너도 잘못했네.. 시작도 네가 했고”라고 할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이 내부에서 나올수는 있겠죠.

    산하님 말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 인종주의를 무기로 쓴다면 결국 그것 역시 인종주의라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인의 외국인 노동자 차별에 분노한 파키스탄이나 네팔이나 태국 사람이 “한국인은 개를 먹는 더러운 민족이고, 선천적으로 수전노들이며 섹스에 미친 거북같은 놈들에다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해 보이면 어떻게든 밟으려 드는 하이에나같은 족속들”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 역시 인종주의자일 뿐 아니겠습니까.

    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전라도, 경상도 처럼 지역적인 기반이 마련되어 있고 그 지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가며 대립하는 정도이면, 다시 말하자면 그나마 안전하게 경상도인으로서, 또는 전라도인으로서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있는 환경 하에서의 “차별”이라면 이것은 상호 편견이지 인종차별처럼 피해자가 어딜 가든지 억누르는 체제와는 다른 것으로 봅니다. 아무리 전라도 차별, 전라도 차별, 해도 경상도인이 광주에 간다면 그곳 사람들을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내놓을수는 없겠죠. (만약 그렇다면, 얘를 들어 조선 기자가 광주로 가서 사람들을 동물 보듯 취급하고 지역인들이 그에 대해 찍소리도 못한다면, 그것은 인종차별이 되는 겁니다)

    상기 예시에서 주의 할 것은 이 버스는 30명 정도 승객 중 25명 이상이 흑인이었는데도 이들 백인승객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들의 인종유희를 만끽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 무슨 말 하는 겁니까” 라고 핀잔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전 그때 뭐가 뭔지 몰라서 걍 쫄아있었음다. 연결해서 그만큼 백인편애의 사회기반이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네팔이나 태국 이민노동자가 만에 하나라도 (그날 밤중으로 맞아 죽어서 자국으로 운송될 각오를 하고) 부산에서 시위장 같은 곳에서 “한국인들 개새끼” 라는 발언을 하면 그것을 인종차별로 봐야 하겠습니까. 역사의식은 전무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국내 노동부가 보호해주지 않는 외국노동자가 한국括?욕할때, 거기서 “차별”을 읽어내신다면 전 그것을 피해의식으로 보겠습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어떻게 한국인을 차별한다는 것입니까. 물리력도, 쪽수력도, 이념력 (언어가 뒷받쳐줘야 가능한)도 없습니다. 받춰주는 힘이 없는 편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인종본질주의를 비판하셨는데 그것은 마땅하신 말씀입니다.

    나아가 결국 그 사람 고향이 어디래냐?의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모두는 인종주의의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본질을 인종 성별 국적등의 칸막이에 국한시켜서 바라보는 인종주의 [racialism]는 지양해야 하겠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종차별2중대 란 표현 및 그에 대한 비난에 의의 제기합니다. 그들의 발악은 시대의 슬픈 자화상일 뿐입니다.

  • 체키와 차카가 테제 및 안티테제이구나..

    뉴스를 온통 인터넷에서 접하다 보니 체키와 차카 사태를 조작된흰색님의 파맛 켈로그 포스팅을 통해서 첨 알게되어서 패러디를 했는데, 글쎄, 좀 더 알아보니 완전히 선함과 악함의 양축으로 만들어놓았네. 사진을 보면 아니 맙소사 체키가 환하게 웃고 차카는 찡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체키는 눈이 크고 동그랗고 입술이 얇고 코가 길쭉한데 차카는 코도 땅딸막하고 눈도 조그맣고 입술도 없으니까 얼굴 부위 전체가 두꺼운 입술로 오해되고. 비반투족 흑인 (서아프리카인가?)의 특성을 차용한 것 같기도 하고. [플래쉬와 비디오 클립에서 이들의 행동방식을 보시라] 이거 분명 필리핀 발 이주노동자 건과도 관계 있을거야! 문화학도들은 분명 지젝 같은 애를 이용해서 증명할수 있을거야 흐흐. 그리고 타자화! 차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때 자기 자신을 정의 하는 것이 아니라 치키가 이미 정의해놓은 특성들을 가지고 거꾸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건 안티테제잖아. 흠

  • 차이를 넘어서: 인종제/다문화 애인 사귀기 토론회

    차이를 넘어서
    인종제/다문화 애인 사귀기 토론회

    [광고용 글]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은 인종, 문화 그리고 종교를 넘어서 연애하며 결혼도 하고 있는데,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무엇인지? 어떻게 극복할수 있는지? 사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지, 아니면 사회의 시선과 문화의 장벽에 부딧히는지? 이런 이슈에 대해 배우고 또한 문제를 던지려면 와보세요. 그리스 음식으로 대접하겠습니다. “다리” [Bridges] 학생 단체 주최

    Dating Across Difference
    Come to Bridges’ Annual Interracial/Cross-Cultural Dating Forum!
    When: Thursday, December 2 Time: 7:00 pm Place: 4th Floor Old Main

    [Advertising] It is becoming increasingly common for people to date (and marry) outside of their race, culture and/or religion. While they say love conquers all, oftentimes there are many seemingly unsurpassable obstacles impeding the success of these relationships. What are some of these problems? How can they be solved? Does love really conquer all, or is it trumped by societal views and cultural norms? Come learn about some of the issues and pose some of your questions. A light Greek appetizer spread will be served.

    =-=-=-=-=-=-=-=-=

    이건 창이님을 위한 잡담인데. 나름대로 흥미로왔던 토론회라 할수 있겠소. 위에 해당하는 연애 및 결혼을 한 학생 및 학교직원 네분을 초대하여 그들의 이야기 및 연애 관련 이야기를 나눈 장이었는데 이들이 누군지 소개를 하자면

    (자기 자신을 소개한 그대로) ㅅ군은 전통 [orthodox] (문화적) 유태인으로써 현재 카톨릭 라티나를 사귀고 있으며, ㄱ양은 흑인/노르웨이계 미국인 혼혈로 여러 배경의 남친을 두어보았고 현재는 아프리카인 남친.. 그리고 ㅋ양은 미국 흑인으로써 백인을 사귀고 있고 ㅁ분은 쿠바/스페인/바스크/아이랜드계 혼혈 게이로써 하와이 원주민 게이를 사귀고 있음. [ㅅ군은 그가 백인 남성이라 일부러 데려온 것임]

    (발언 내용은 시차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님)
    =======================
    ㅅ군 왈.. 전통 유태인은 옛적 집단 강간의 경험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유태인의 후계를 순전히 어머니의 계보로만 봅니다. [바깥 인종에] 강간을 당해도 어머니가 유태인이면 자손이 유태인이라는 논리를 만들려고 생겨난 것인데.. 그런 연고로 나의 부인이 유태인이 아니면 난 논의 밖에 있고 자손은 유태인이 아니게 되요. 난 랍비가 될 계획이기때문에 이러한 전통 유태인의 법률은 절 화나게 하는데, 랍비는 순수한 유태인 자손을 남기지 않으면 될수가 없기 때문에 비유태인과 결혼하면 랍비가 될수 없는 현실이 통탄스럽습니다..

    ㄱ양. 전 일정한 인종적 틀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별별 오해를 다 받어요. 라티나라느니, 원주민이라느니 등등.. 그런데 사람이 제가 흑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흑인의 이미지에 맞추여 보려고 해요. 예를 들면, 난데없이 “흑인이라고! 춤은 잘 추겠구나!” 또는 “머리는 왜 이리 흑인 답지 않게 땋았니?” 많은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보았고 백인도 사귀어 보았고 지금은 아프리카 흑인.. 그런데 특히 미국 흑인 사이에선 제가 흑인 치고는 피부색이 옅으니까 “흑인이니까 오케이고, 피부색도 옅으니 좋구나” 하는 반응이 좀 있어요. 음 성관계와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성관계가 쉽잖아요? 인간관계는 시간이 걸리고 서로 알아가는 것이 편하지만도 않은 것이니 친해지면 첨 것부터 하게 되요. 연애는 인간관계가 중요하죠. 가끔 보면 웃긴 소문도 있어요. 누구 누구는 물건이 크다.. 하는 소문들, 꼭 카리브나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에 대해서만 퍼지더라구요? 인종 기대적으로 퍼지는 것 아니겠어요.

    ㅋ양. 전 아주 보수적인 흑인 가족에서 살았서요. “왠만하면 흑인 남성과 사귀고, 정 다른 인종이라면 백인은 사귀지 마라” 하는 분위기에서. 그래서 일부러 인종에 제한을 두고 살았어요. 제가 남부 흑인 동네에 살아서 접촉 기회도 없었고. 대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배경에서 자란 이들을 만났는데, 내가 흑인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하 백인과 라티나를 사귀었으니 이제 흑인도 사귀어 보면 난 참 편견 없는 자유주의적인 백인이 되겠구나” 하는 입장 같은 것. 꼴같아서.. 지금 같이 사는 동거인은 백인인데 대학원 때 만났어요. 제가 피부 톤이 아주 어두워서 쉽게 “내가 백인으로서 흑인을 사귀니 참 특별하구나” 내지는 “이 흑인뇬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품기 쉬운데 그런 점이 없고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주는 이 사람.. 그렇게 알아가며 이끌리는 점이 있었지요. 아 그리고 이번 토론회에 대해서 말인데, 벽보에 써붙인 광고를 보니 참 사납게 광고를 했어요. 예를 들면 “코피 아난의 부인은 백인이래요!” 또는 “누구 누구 고추가 제일 클까?”둥둥.. 여기 주최한 너희들은 유일한 의도가 반응을 일으켜서 학생들을 오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 잘 알겠지만 학교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런 행사에 시간이 없던 있던 올수 없거든.. 그래서 그런 포스터 슬쩍 한 번 본것이 너희들 “다리” 단체에 대한 느낌을 만들어 버리는데 “누구 고추가 제일 클까”라니.. 여러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서 광고해야 하는 것 아니에욧! 버럭!~ 제가 대학원 다닐 시절에는 흑인연합이.. 다른 단체도 아닌 흑인학생연합이 모임을 열었는데, 세상에, 이름을 “KKK”라고 지었어요. 그래서 학교가 뒤집어지고.. 흑인학생 연합의 지도자들은 씩씩거리며 모임에 나타난 학생들에게 “어.. 그게 흑인 학생들 참여가 부족해서 이거 좀 고쳐볼려고 그랬다.. 오해 했다면 미안하다..” 그러는데 길 건너편에선 흑인 학생들이 영문도 모르고 항의 시위를.. 하여튼 튀는 것은 생각해보고 하시라는 말.

    ㅁ분. 저도 별별 오해를 다 받았어요. 인종 본질주의 및 오리엔탈리즘.. 말하자면 끝도 없어. 할아버지 쯤에 가면 이태리도 있는데, 마피아 같은 놈이라느니, 쿠바인이니 라틴 연인, 라티노 연인, 당신이 내 쿠바 독재자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스페인이면 또 탱고, 춤은 추냐, 등등. 쿠바인이지만 자라난 곳은 뉴욕시의 브룩스 동네인데 이곳이 아주 심한 게토이거든. 그래서 가끔 브룩스 사투리를 쓰면 사람들이 내가 흑인이냐고 묻고, 가끔 쿠바 동네 사투리를 쓰면 또 당황해하고, 날 상자에 집어넣으려고 안달들이야. 그리고 아무래도 게이 사회라는 것이 우리 유색인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소수가 되는 사회인데, 그런 곳에서 “난 백인이 아니다” (제 피부 톤이 아주 얕아서 쉽게 백인으로 오인되곤 하죠)라고 나서면 금새 다른 게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하여튼 유색인 게이로 사는 것은 (헤테로 주류) 유색인 공동체 쪽에서도 좋게 안 봐주고, (백인) 게이 쪽은 날 인종적으로 뚝 갈라 보니 불편해요. 나 같은 특수한 경험을 지닌 이들은 끼리 끼리 모이는 가봐요. 지금 사귀는 이가 하와이 원주민이니 말 다했지. 그런데 상대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오늘 사귀는 이와 같이 올려고 했는데, 그이가 약속이 있다면서 빠져버렸거든요. 그런데 그이도 이런 토론회를 자신 없어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야 우리 늘상 하는 이야기가 게이로서 인종소수자인 것에 대해 이야기 하잖아. 그냥 그 이야기 또 하면 되” 했더니 얘가 “우리가 언제 “늘” 인종 이야기 하냐..언제 했는데?” “어… 어.. 한번…” “한 번 말구, 또 언제” “음 그게 다네?” “것봐”. 웃긴것은 그도 자신의 대학에서 [직원임] 다문화 담당자이고, 나도 맥에서 기숙사 담당 및 다문화 담당을 하는데 우리 끼리 개인 적인 수준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참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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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에도 질문답이 오고갔는데 이게 지난 목요일이니 기억이 나야지 말이야. 음 주로 관계라는 것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받아들이고, 인종 같은 것으로 축소해서 관계 파탄내지 마라, 류의 충고가 압도적이었는데 이에 대해서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연애 관계를 순전히 인종적으로 축소해버리는 것이 테제 (thesis)이고 개인 대 개인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이에 대한 반 테제 (antithesis)라면 이를 극복하는 합성 (synthesis)가 있지 않을 까 하는 것인데.

    웃기게도 한국 남성들이 환장해 있는 남나라 여성에 깃발 꽃기와 맥락이 같다. 그러니까, 아시안 아메리칸 시인이 “나는 백인 여성과 섹스 할 때마다 미국이라는 국가에 박아 대는 착각을 한다”라는 요지의 시를 읅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라티나 여학생이 “어 나도 그래…”라고 해서 홀라당 놀랐다는. 그러니까 그가 사귀는 백인 남성이 있고, 우리 모두 그가 누군지 아는 상황인데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그리고 내년 결혼한다는데? -_-) 하여튼 여성 주의 초기의 슬로건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처럼, 지극히 개인 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연애 관계를 인종 정치적으로 들여다 볼수는 없는 것일까? 반항적 행위는 가능 할까 ? 등등의 물음. 토론회에서 차마 이 질문을 던지지 못한 것은 당사자들이 너무도 진진하게 “개인 관계라니까..” 를 강조해서. 토론회 끝나니 다들 자리를 뜸. 할 수 없이 아는 애들 붙잡고 “야 너 걔가 백인과의 섹스에 대해 했던 말 기억냐냐? 오늘 그거에 대해 물어보았더라면 어땠을까? 깔깔” 로 만족했다는

  • [번역]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번역 작업사이트: w.yokim.net/White_Nationalism_and_the_Multiracial_Left

    세상 크게 보기: 마이클 무어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한국어 번역]
    케년 훼로우, 길자 김

    Connecting the Dots: Michael Moore
    White Nationalism & the Multiracial Left [korean translation]
    by Kenyon Farrow and Kil Ja Kim
    nathanielturner.com/connectingthedots.htm

    2004년 6월 9일

    영상작가 및 평론가 마이클 무어가 [미국] 좌[익]의 깡패로 변하는 것에는 겨우 십년 밖에 걸리질 않았다. 혹자는 뉴욕타임즈지의 베스트셀러를 두권이나 출판하며 2003년 총기산업을 다뤄서 오스카 다큐 대상을 받고 금년 깐느 축제에서 부씨를 비판하는 화씨 9-11로 최고상을 받은 무어를 좌익에 포함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마이클이 “진보”, 또는 “급진”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디즈니사 CEO 마이클 아이스너가 화씨 9-11을 막아버린 이후 영화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다큐를 배포하겠다고 나선 데 있다. 결국 그가 주류 미디어계에 갈채를 받으며 (깐느에선 장장 이십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낌을 받는 깡패가 된 것은 그를 바라보는, 주류 정치담론에서 배제된 수많은 좌파인들에게서 홀대받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무어를 좌파정치와 연결해서 보는 것은 “좌익”이 의미하는 바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좌익 내부의 향방이 무어의 방법에 복선으로 깔려있는 상태를 문제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마이클 무어는 백인 국가주의자일뿐 이다. 그의 백인국가주의적 접근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생각하는 이들과 제도화된 좌익을 연결시키는 점이다.

    혹자는 “급격한” 단체들에게 허용되는 백인 국가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헷갈려하실수도 있겠다. 우리가 보기에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은 미국내 사회관계에서 이미 정상적인 것으로 전략한지 오래다. 백인들의 역사와 경험에 근거한 국가형성 계획이 우리가 말하는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이기 때문이지. 백인국가주의는 그저 백인중심의 사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백인 국가의 (이는 정부가 합의한 변경을 따르거나 사회상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일수도 있겠다) 지속 및 확장을 백인의 근심, 걱정, 공포 및 욕심등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백인국가주의 담론은 백인성과 미국시민사회,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시민권의 인종 계획화 및 성적계획화를 지나치곤 만다. 백인 국가주의적 접근의 첫 시발점은 “백인이 자신의 국가를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이다. 고로 백인국가주의 계획의 시선은 정부세력, 민중으로부터 발생하는 “반항성” 또는 세계 경제의 흐름중 어떤 면이 백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느냐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무어의 작품을 잘 살펴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는 주제가 백인 시민의 잃어버린 권리와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란 것을 알수 있다. 미시간주 플린트시의 자동차산업 대량해고나 무기산업, 2000년 대선 무효나 미국애국법 [USA PATRIOT Act]를 다루며 이들 문제가 유색인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무어는 이러한 문제가 문제 자체가 되는 이유를 백인 시민/노동자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멍청한 백인”의 개론중 무어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미국인들은 다 누군가가 우리의 밤샘 잔치의 전원을 뽑았다는 것을 안다. 미국의 세기는 다 갔다. 21세기 악몽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러한 “미국의 세기”가 끝났음으로 제시되는 이유들로 선거부정을 저지른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것, 일자리들이 [주로 전문직] 축소 및 해외수출되고 있다는 점, 주식 시장이 호황이 아니라는 점과 집 주인들이 융자금을 갚기가 어렵다는 점을 든다.

    이러한 백인 중산층류의 불평불만은 “친구야, 내 나라 어디로 가뿌렸나?” 에서도 확연하다. 제목만 보아도 백인 국가주의 이념에 핵심 역할을 하는 소유 및 권익 정서를 표현하지 않나? 9-11과 이라크 전쟁에 촛점을 두는 “친구야…”는 정경유착과 미국 시민/노동자의 낮아지는 임금/구매력에 대한 비판이자 국가의 “개혁 가능성” 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다.

    중산층이 집 구할때에 융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현실에 대해 불평하거나 2004년 대선에서 부시를 넘어뜨릴만한 이들을 선거장으로 끌어내는 일에 있어서 무어는 (노예가 아닌) 시민의 [여기서 “비노예 시민”은 백인을 가리킴] 공화국을 개혁할 능력에 대해 긍정적이다. 하나의 주장을 끝 매듭지으며 무어가 하는 소리를 보시라 “어떤 나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 그런 나라는 또 없습니다…. 아주, 아주, 자유개방적이고, 해방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는 이 나라… 이 빨갱이 낙원의 이름은 다름이 아닌 미대륙합중국 이라지요!” 무어의 이러한 긍정성은 자신의 인생 자체가 미국 비백인의 경험과는 다른 백인의 인식에서 근원하는 것 자체에서 백인중심적이지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백인우월주의적인 정부와 백인 시민성에 대한 베팅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무어는 결코 “미국 국가의 계획” [the American project] 상 “시민” 또는 “국가” 같은 개념들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어떻게 건축되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 발드윈 [James Baldwin]이 “백인공화국”으로 축약한 그것에 상기 개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지 프랑크 리흐 [Frank Rich]의 [그 또한 백인좌파엘리트이지만] 말을 빌리자면 무어는 “everyman” [소시민] 이다. (이 또한 인종차별주의 및 성차별주의적인 용어이며 백인 남성을 위해 거의 집중적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실제로 소시민 이든 아니든 그가 백인시민의 국가정부내의 접근권 및 포함됨을 급진적인 변화에 우선함은 확실하다.

    무어가 국가정부와 포함됨에 집착하는 것은 그가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미제국의 지배정책 등등의 미국계획을 실제로 의문시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무어에게 있어서 “실상의”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은 기업 견제, 공권력과 이를 지지하는 특정이권그룹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유한 백인남성 (또는 “멍청한 백인 남성”) – GM사의 회장 로저 B. 스미스, 록히드 마틴사의 관료 에반 막컬룸, NRA 활동가 차를턴 헤스턴, G.W 부시와 딕 체니 – 및 그들의 욕심에 피해를 보는 백인 중산 및 노동자 계급에 촛점을 맞출 뿐이다. 무어는 자본부의를 그 자체로서 억압적인, 특히 비백인 인구에게 그러한 체제로서 비판하지 않고 그 대신 부유한 백인남성들이 그렇게 욕심쟁이이지 않기만 하다면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분석한다. “멍청한 백인 남성” 논지의 전제는 결국 자신의 동포인 중산층 및 노동계급 백인들과 소유를 공유하며 그들 또한 미국 계획의 산물을 누리도록 해야 하는다는 것인 것이다.

    무어식의 부패한 개인들을 문제화 하며 동시에 부패한 제도를 (기업 또는 정부 등의 구조에 의해서 현실화되는) 문제화 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백지수표를 내주는 것과 다름없을뿐만아니라 내부 차이에도 불과하고 백인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협력해서 백인우월주의와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을 통해 모든 형태의 억압을 지탱하는 현상을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거한 그들의 백인우월주의 및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은 동시에 그들의 반흑인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에 대한 투자를 나타낸다.

    1787년 헌법 모임의 토론에 나타났듯이 미국에서의 시민권이란 개념은 원래부터 노예화된 인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시민” 또는 “자유로운” 사람은 특정인종과 성의 테투리 내부에서 시민사회에 참여할수 있었다. 이 구조는 반개념 [antithesis]인 노예의 개념에서도 적용된다. 여러 사회 그룹이 노예 제도 또는 토지에 포함된 하인 생활에 얽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만이 평생 노예로, 다시 말하자?자유와 공(共)화국의 [re/public] 참여에 합당하지 않는 인종으로 이해되었다. 합법적 노예제도 시대 동안도 몇몇 안되는 “자유로운” 흑인들은 끊임없이 노예로 복귀시키겠다는 협박 및 폭력 그리고 실상 및 실법 차별아래 있었다.

    오늘날 미국이란 계획이 여러 인구들을 섭렵하면서 백인 공(共)화국을 다인종 공화국으로 만든 이후에도 흑인성은 시민성 또는 “흡수될 만한것”의 경계선 바깥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하여 시민성의 사유의 주체의 반개념으로 작동한다. 비흑인 유색인종의 시민권이 원래 희미하며 결코 백인시민권의 위치에 필적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도 흑인성은 반-시민으로 작용하여 다인종 미국계획에 뚜렷한 경계선을 제시한다.

    무어식대로 시민권과 민주주의에 투자를 하자면 죠이 제임스가 [Joy James] 지적한 것 처럼 미국 사회만큼 철저히 인종세분화된 사회에서 “범죄성, 반사회성, 부도덕성 그리고 부패가 흑인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현상”을 문제화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무어가 이런 방식의 분석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백인 군인의 가족원을 인터뷰 할 때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왜 그들이 총에 집착하는 지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그들이 왜 자신을 “범죄자” 또는 “침입자”들을 상대로 보호해야 한다며 무장해야 하는 지 설명할때 무어는 그 “범죄자”는 분위기상 흑인을 가리치는 것임을 문제화 하지 않는다.

    이렇게 잘 조직된 반정부 군단체들이 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왜 젊은 표범당 [Black Panther Party]나 미 원주민 운동 [American Indian Movement (AIM)] 같은, 호전적인 백인정부와 시민사회를 향해 무력해방시도를 주도한 단체들은 FBI 첩보원, COINTELPRO 등의, 흑인 및 미원주민 공동체를 분쇄하려는 수많은 조직들에 의해서 구조적 및 폭력적으로 해체당하면서도 무어는 그러한 파괴를 주도한 정부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비판을 가하는가?

    다시 설명해보자. 무어가 자신을 포함시키는, 그리고 좋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백인시민대중은 동시에 흑인 및 원주민을 억누르는 백인국가정부의 보호를 받는다. 억압의 형태는 대게 급진주의를 제거하거나, 공공교육예산을 감축하거나 게토와 가난한 농지에 여러 종류의 구조조정 정책을 감행하거나 가난 및 중독을 범죄화 하거나 (그러면서도 마약 거래는 조장하고!), 공공 주거지역 및 원주민 구역 그리고 경찰력을 통한 억압 및 대규모 감옥화등을 지닌다.

    우리들이 무어가 반흑인 계획을 추진한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불공평하다고 할지도 모르겠군. 그의 저서와 영화속에서 무어는 노예 제도, 인종검문 및 감옥화등을 다루지 않던가? 라고. 물론 그러하긴 하지만, 무어는 그러한 비판이 그의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흐트리지 않는 수위에서만 문제제기를 할 뿐이며 오히려 그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인종차별적인]상황이 전제되어야만 대중이 지지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백인 시민/노동자/반기업 주체가 존재할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종종 무어는 이러한 패러다임에 들어맞는 비백인들에게 그의 지지를 보내는데 바로 이러한 “너그러움”이 있을 수 있다는 상황 자체가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의 협력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백인국가주의와 다인종 공/화국에 대한 지지와 공존 하는 예시로 “친구야…” 에서 9-11후 중동 및 남아시아 발 이민남성의 이유 없는 수색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국가 보안의 비호 아래 비백인을 도매로 잡아들이는 것은 백인우월주위라는 점에 대해 동의 할수는 있지만 우리는 무어가 이민자들을 변호하는 방식을 문제화 한다: “많은 사람들을, 그들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 할 만한 이유도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비-미국적이다 [un-american]”. [번역 주: 비미국적이라는 단어는 9-11 후 이민자들과 외국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을 국내 정책 담론에서 소외시키기 위한 부시의 매체 전략이었음] 이 선언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람을 특정 이유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매우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투옥율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것을 생각하자면 말이지.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무어가 비백인 이민자들의 투옥 및 추방을 문제화 할 때 그 논리에 깔려있는 전제는 “범죄적” 인체는 “위험하고” 그로서 그들은 투옥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노예 제도가 끝난 후 미국의 흑인들이 다른 인종 그룹과 비교 할 때 압도적인 비율로 투옥된 점, 그리고 “자유 서방”에서 흑인성은 경찰이 훈련을 받을 때 범죄자의 기본 형태로서 제시된 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무어가 이민자들의 불공정한 투옥에 대한 가하는 비판은 이들 이민자들이 “진짜 범죄자” (말하자면 흑인) 가 아니면서도 범죄자인 마냥 다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읽을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흑인의 위치성을 사회 구조의 필요조건으로 읽는 대신 이를 가져와 결백에 대한 이야기를 풀려 쓰는 것이다.

    무어와 그가 지지하는 다인종 좌익 사이에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이들은 공유하는 점 또한 지니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멍청한 백인 남성”을 비판하는 진보 운동은 흑인성에 대한 공포에서 그 원천을 찾는 다고 할수 있으리라. 쉽게 말하자면 흑인에 대해 관심은 없고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수 있다.

    미국의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자. 이는 다인종적인 노동조합, 이민 권익, 반 노동착취 [anti-sweatshop] 반기업 그리고 반 감옥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크 윌더슨은 [Frank Wilderson] “반 세계화 운동의 민주적 포퓰리즘은 이념 및 물질적으로 반흑인성으로 묶여있는데 이 반흑인성은 말하지 않고서도 이해되는, 그러면서도 필수적이며 광범위한 성질을 지닌다.. 반세계화 운동이 흑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이들이 난민일 경우 일 뿐인데 이 경우 그들은 다른 이의 사업에 무단침입한 것 뿐이다”라고 적절하게 기술한다.

    윌더슨에 의하면 반 세계화 운동에게 “가능성의 전제”로서 흑인의 죽음은 잭슨 민주주의에 [Jacksonian]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 이는 19세기의 전통으로서 “소시민” 백인 남성에게 백인 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시민사회와 시민 권리를 더 넓히려는 목적을 지녔다. 이 시도는 미국긍정이면서 반지배세력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반흑인성을 띄었는데, “소시민”의 권리창출과 자기 교육은 노예 제도 또는 노예화 된 비합리적인 대상의 존재 하에서만 형태를 갖출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잭슨 민주주의파 처럼 무어 또한 사회가 흑인의 위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에 의지해 지배 세력가 투쟁하는 것 처럼 보이는 “소시민”의 권리를 지지할 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허나 윌더슨이 지적하듯이 “오늘날의 반 세계화 운동과는 달리 잭슨파는 내놓고 그들의 백인 우월주의를 천명하였다.” 흑인의 죽음은 사회 기회와 사회 움직임의 가능성에 구체적 형태를 주는데 오늘날 다인종 정치의 세기에, 시민권 및 민주주의에 집중하는 백인은 흑인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멍청한 백인 남성들” 또는 “권력을 잡은 백인들” (이런 표현은 사실 필요하지 않는데도) 을 조롱하고 못박으면서 백인국가주의로 낙인찍히는 것을 면하고 동시에 소수의 유색인들에 (무어의 경우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 대한 지지를 표현할 수 있다.

    무어와 수 많은 좌익 운동은 공유하는 점이 크다. 오늘날 공(共)화국의 다인종 본질을 고려할 때 살아있는 제도화된 진보운동 중 명백하게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그러나 미국 계획이 흑인의 억압 및 죽음의 구조화 인것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진보 운동은 “멍청한 백인 남성”을 후리는 것에 있어서 무어와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

    오늘날의 다인종 진보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는 아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한편으로 미국 시민사회를 접근하기 위한 시도이며 반면으로는 흑인성의 저지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두렴움을 표현한다. 이런 성향은 대중의 시민권 접근성 및 시민/개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을 통해 확인할수 있다. 모든 좌익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무어의 계획과, 또한 19세기 잭슨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단순히 말해 반흑인 인종차별이다. 윌더슨은 이 문제에 대해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 “모든 반공적 정치 흐름이 백인 긍정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항상 반 흑인주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간단하게 말해, 다인종이던 아니던 어떠한 정치적 성향의 운동이라도 근본적으로는 미국 계획상의 흑인 위치성을 문제화 함으로서 급진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대신 그 흑인 위치성에 의지해 정치세력화를 꽤하며 시민권, 민주주의 그리고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운동가들에게 놓인 과제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어떤 방법으로 무어 성향의 반흑인 인종차별 및 성차별 그리고 백인 국가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을 피하는 가 하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흑인의 생물 및 사회상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고 시급한 이슈를 위한 지지/자금을 구할 것인가? 백인 국가주의 속성상, 비흑인들은 어떻게 하면 흑인 범죄수의 상(狀)을 자신의 안티테제로 제시하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며 결백을 증명할 것인가? 흑인의 사회적 위치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를 흔드는 과정으로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문제화 할수 있는가? 그러한 시도는 어떠한 형태 또는 담론을 지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국가주의/다인종 정치의 시대에 “좌익”으로 이해되어지고 씌여지는/출판되는/소비되고 제도화되는 정치 언어, 정체성, 운동에 대한 신념과 염원의 재 구조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과제일수 가 없다. 그러한 재구조화를 위해서는 이미 정착된 담론과 제도화된, 진보적으로, 급진 또는 혁명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정치 형태를 문제화해야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은 마이클 무어등의 정치계획을 포함하는 제도화된 좌익 담론을 비판적으로 상대하며 때가 되면 그 테투리를 넘어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 * *

    케년 훼로우 [Kenyon Farrow]는 뉴 올리언스 [New Orleans]에서 활동하는 필자, 운동가 및 연출가이며 길자 김 [Kil Ja Kim]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활동하는 연구자, 교육가 및 운동가입니다.

    원 저자 연락처:
    Kenyon Farrow kenyonfarrow@hotmail.com
    Kil Ja Kim kiljakim2003@yahoo.com

  • 자위로 생각해보는 언어와 사고의 연관성

    1.

    • 넌 생각 할 때는, 무슨 언어를 쓰는 데?
    • 걍 생각 하는데…?

    사고의 과정은 특정 언어 표현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는 다고 봅니다. 생각은 생각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할 경우에만 특정 언어를 사용, 그 때 그때 어휘와 문법의 적절한 조합을 사용, “표현” 하는 것이라는 것이라죠. 그런데 이걸 공감하지 못하는 아해들이 많더라구요. 혼잣말은 어떻게 하느냐.. 원래 생각이라는 것이 언어적이지 않더냐.. 등등. 그런데 이건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견해차이 같아서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았죠. 난 원래 생각을 말로 하질 않지만 아주 피곤하거나 힘들면 생각을 입으로 소리내서 하게 되거나 머릿속으로라도 일부러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고. 숙제를 해야 겠다라는 것이 “숙제를 해야 겠다” 라는 기표인가, 아니면 [숙제] 라는 물건의 해결을 봐야겠다는 [결심]과,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 등의 느낌의 결합 아니겠어요? 설마 [숙제]라는 단어 자체가 숙제의 뜻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겠죠. 특정 언어 환경이 아닌 이상 “하우스아우프가베”가 [숙제]가 될수가 없듯이. 그걸 생각 한 것이.. 십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이에 대한 입장이 많이 바뀌지 않았다면 존중해 줘야 되지 않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그것부터 물어보더군요).

    생각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니 말도 안된다, 와 반대의견이 팽팽하게 몇 분 맞섬. 아무래도 입장이 좁혀지질 않아서 연관이 있는 주제를 하나 빼어들었슴다.

    • 야 너는 자위 할 때.. 특정 여자를 염두에 두고 자위 하냐? 난 그런 건 상관 없거든?

    특정인을 생각하며 자위한다네요. 흠.. 자위는 섹스를 하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 보충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몸이 자극을 원하니까 되는 되로 자극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일까. 난 느낌을 받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만인데.. 얘네들은 더 구체적인 것을 필요로 하나보다. 웃긴 것은, 남성이 셋인데도 다들 동의했다는 것.. 여자 없이 어떻게 흥분하냐.. 이상한 놈이다… 옆에 앉은 여성동지가 하는 소리가, “다른 문화권들은 성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고 읽어 본적이 있어! 그래서 다름은 존중해줘야 해!”. 윽, 동지여, 그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구체적 대상 없이 자위가 안 된다는 놈들은 상상력 부족으로 치부하기로 했음.

    2.

    고딩 때 파멜라 안데슨 없이 자위가 안 된다는 이야기 말고도 충격을 받았던 이야기는.. 아해들은 보통 손으로 자위했다는

    아 참, 그렇게 필수적인 정보는 제 때에 공유해서 남에게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게 해야지, 끼리 끼리만 희희덕 거리니 우째 알수가 있나? 다 같이 모여서 딸딸이 치는 것두 아니고. 어떻게 알게 되었나 하면, 아해 둘이서 얘기를 하다가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것이 더 좋냐, 손바닥 전체를 사용하냐”를 듣고는 감을 잡았다는.

    몽정이란 것은 참으로 불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빨기도 애매하고, 가족에게 알리기도 난처한 사회적으로 미리 정의 되지 않은 그 아dd함. 한 많은 사춘기에 필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그 날 밤은 몽정에 시달리곤 했는데 이를 해결 하는 방법이 자위로 진을 빼놓는 방법이었고 손 없이 성공을 하려니 밤새도록, 서너시간은 거뜬히 끊임없이 잠옷을 벗고 등을 흔들고 배게로 마찰을 시켰다는. 그런 중노동 후에 오는 느낌은 타의 추종을 불허. 상기 노하우를 듣고 손을 써보니 상대적으로 너무 빨라 허탈했다는

    고로, 근대 헤테로 남성의 성해방은 아직도 손으로 하는, 구체적 대상을 상상하는, 등의 별의별 주류적 사회합의된 성적 놀이의 한계를 한 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죠. 기왕 할거면 내맘대로 하자구

    저기 상반 사진에 나온 왼손을 너무 뚫어지게는 보지 말라는.

    이거 읽고 삘받았다면 왠만하면 짬지닷컴사장님의 상품을 사용해 주자는.. 자본주의도 아는 사람끼리끼리 (트랙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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