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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소년들에게 꿈을 이룰 기회를 달라

    DREAM Postcard FYSH Korean 070309 청소년들에게 꿈을 이룰 기회를 달라
    교차로 11-2-07 A4, 11-5-07 A4
    http://krcla.org/blog/652/

    몇 년 전, 미네소타 주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방과 후 프로그램에 자원해서 초등5학년 어린이들에게 읽기와 수학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어린이들의 세계란 오묘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들을 쏟아내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독특하다. 어린이들이 가장 즐겨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자신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것이다. 자기 할머니처럼 다리가 아픈 사람들을 돕겠다는 어린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린이, 빨간 모자와 망토를 두르고 멋있게 불을 꺼 사람들을 구하는 소방수가 되고 싶다는 어린이… 어린이들은 각자 이런 아기자기한 꿈을 먹고 자란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사회가 혼탁해도 희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어린이들이 나중에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어린이들의 꿈을 짓밟고 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와서 이민신분이 없이 초중고 학교를 마친 서류미비자(불체자) 학생들은 대학을 가는 것도 어렵고 원하는 일을 하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대학을 가려니 돈이 부족하고, 정부에선 보조금을 주지 않고, 막상 합격해도 학교측에서 온갖 차별을 가하고, 학비를 보충하려 일을 하려고 해도 퍼밋도 없으며, 부모 세대의 본국으로 돌아가 그곳의 사회에 적응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다. 현재 미국에 이러한 사정에 처해 있는 이민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170만명이나 된다. 한인 5명 중 1명이 서류미비자인 현실 속에서 이러한 상황은 결코 외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보기…)

  • 이민개혁 우리 손에 달렸다

    http://www.koreadaily.com/asp/article.asp?sv=la&src=opn&cont=opn&typ=1&aid=20070517181125100100

    “이민개혁안, 올해는 통과 될까요? 언제쯤 통과 될 수 있을까요? 드림 법안이 통과되야 우리 아이가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공부 할 수 있을텐데..” – 포괄적 이민개혁안의 하원 상정에 이어 상원 상정이 눈 앞으로 다가오자 매일 같이 걸려오는 문의 전화의 내용이다.

    2007년이 진행되면서 지난해 전문가들이 내다보았던 이민개혁에 대한 예상이 모두 뒤집어지고 있다. 하원 신임 민주당 의원들이 대다수라 이민개혁 관련 경험이 없어 법안이 합의되고 상정되기까지 오랜기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 상원에서 매케인과 케네디 의원이 합작하여 다시 법안을 먼저 상정시킬 것이라는 점 등 모든 예상들이 빗나가고 말았다.

    3월이 되자 하원에서 주도적으로 드림법안과 포괄적이민개혁법안을 속속히 내놓았고 하원의 이민개혁안인 STRIVE 법안에 민권보호와 합법화 이행등 시정할 점이 있긴 하나 이들 법안을 다루는 것은 분명 이민자 커뮤니티에게 긍정적인 움직임이였고 단체들은 이러한 진전을 환영하였다. 반면 상원은 매케인 의원이 중간에 이민개혁 논의에서 갑작스레 빠지면서 공황 상태에 빠졌다가 백악관의 주도로 이민자 커뮤니티와 한인 사회에 극도로 불리한 안이 논의되고 있다.

    매케인은 왜 이민개혁 논의에서 빠졌나. 혹자는 2008년 대선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며 이민개혁 논쟁 처럼 찬반이 엇갈리는 이슈는 후보로서의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려 빠졌다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그것이 맞으나, 구체적으로 볼 때 커뮤니티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선을 염두에 두고 전국을 순회하는 매케인 의원이 2007년 2월 중순 경선에 큰 영향을 끼치는 아이오와 주를 방문하여 주민회의를 가지는 중 반이민단체들이 대거 출현하여 매우 예리한 이민관련 질문을 던져 그의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혔기 때문이다. 이는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부분이였고, 한마디로 반이민자 진영에게 한 방 먹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친이민파 공화당원 매케인 의원의 입장 변화가 자의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이민 성향의) 커뮤니티 압력에 의해 바뀌었다는 것이다.

    매케인이 빠진 상원 이민협상팀은 반이민 강경파 의원들로 채워졌고 백악관의 제안이 공론화 되면서 협상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백악관의 제안은 가족초청 대상 대부분을 없애서 해당 쿼터를 취업비자에 할당하고 가족 재결합 등의 가치에 기반한 미국 이민제도를 경쟁제도로 바꾸어 점수제를 도입하고 있다. 또한 서류미비자 합법화 의제를 백지화하고 기존의 서류미비자는 고액의 (4인 가족 기준 $65,000 이상) 벌금을 부과하고 신규 초청 노동자는 미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일만 끝내고 돌아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제안은 이민자를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기계로 보는 시각에서 나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2005년에는 모든 이민자 커뮤니티를 범죄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2007년에는 이민자들을 일만 하고 돌아가라는 비인도적인 정치인들의 속셈이 실망스럽다.

    지난 총선의 결과로 다수를 차지한 민주당은 다수당 답지 않게 이민개혁에 있어서만은 공화당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며 서류미비자 합법화, 노동자 권리, 심지어는 가족 이민까지도 포기하려는 태세를 보이고 있다. 이민자 커뮤니티는 향후 20년 이민역사를 좌우할 큰 고비를 맞닥뜨린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민자 커뮤니티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난 4월 30일, 5월 1일 아시안 태평양계 커뮤니티 관계자 400 여명은 한인 커뮤니티를 선봉으로 워싱턴 DC에서 모여 인도적 이민개혁 촉구와 백악관 제안 반대의 집회를 가졌고, 총 60여명의 미연방 상/하원 의원 사무실을 방문해 인도적 이민 개혁 필요성을 교육시켰다. 이날 집회는 전국의 동포사회 언론을 포함 워싱터 포스트, ABC 뉴스 등 모두 100여개 이상의 주류 및 지역 언론 기관을 통해 보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언론 홍보를 통해 아태계 커뮤니티도 이민개혁 운동의 한 축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대표단이 방문한 의원 중 로이스 캡스 하원의원 (산타바바라에서 산루이스오비스포에 이르는 해안 지역 가주23번 구역 대표의원)은 이틀 후 5월3일 대표단이 일부조항수정을 조건부로 지지하는 STRIVE 포괄적이민개혁법안을 공개적으로 스폰서 했다.

    이 모든 것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86세 연장자부터 16세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 연령대, 언어권, 배경을 아우러 수백명의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합심하여 인도적 이민개혁을 목표로 엽서 카드 서명받기, 전화걸기, 그리고 의원 방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을 통해 정계를 교육한 성과라 생각된다.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다. 이번 주 부터는 미 연방 상원에서 가족 초청 폐지 및 비현실적인 서류미비자 합법화 프로그램 사안에 대한 협상 시작될 것이다. 현재 남가주에서 바라보았을 때 상원 논의에서 핵심적인 인물들은 해리 리드 의원, 다이앤 파인스타인 의원, 그리고 백악관이다. 백악관 제안이 만일 상정 될 경우 파인스타인 의원이 이에 찬성표를 던지는 불상사를 막아야 한다. 민족학교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전화걸기 및 서명 캠페인, 상원의원 사무실 방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강건너 불난 구경하듯 이민개혁 논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주변의 사람들이 전화를 한 통이라도 더 하게 해서 한인 커뮤니티와 이민자들이 대대손손 살아갈 터전을 내 손으로 마련 할 것인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이민개혁에 대한 커뮤니티의 의견을 지금 당장 전달해야 한다.

  • 전쟁 싫어 축구 좋아

    토요일 아침에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져서 나가보았더니 아이들이 피켓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각자 까만 종이에 크레용으로 이쁘게 색칠을 하며 어떤 메세지가 가장 효과적일지 열띤 논쟁을 하고 있더군요.

    “전쟁 반대도 하고 우리가 좋은 것을 달라고 하자”
    “I like candies!”
    “형아 그러니까 ‘전쟁 싫어 캔디 줘’ 라고 쓰면 되는거야?”
    “그렇지만 캔디는 너만 좋아하는 거잖아. 우리 넷이 다 좋아하는 것을 쓰자!”
    “사커! 사커!”
    “I like soccer not war”
    “다 같은 메세지를 써야 딴 사람에게 전달이 잘 되는거야” <– 이 “형”이 3학년입니다 -_-
    “Me too! I like soccer not gun”
    “어쩌다가 전쟁에 대한 대안이 축구로 결정이 나버렸습니다.
    “용호 삼춘, ‘부시” 어떻게 써요?”
    “B-u-s-h”
    “‘라이드’는 어떻게 써요?”
    “l-i-e-d”
    피켓 종이가 완성되자 다른 어른 참여자들에게 잘 보이도록 높은 막대기에 덕테잎으로 묶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집결지에 도착해서는 다들 햇볓때문에 힘들다고 피켓을 안 들고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사진 전공하시는 분이 무려 330장을 찍었는데 피켓이 한 장도 안 나왔습니다. ㅠ.ㅠ 며칠 있으면 버려질 게 분명해요.

    너무 아쉬워서 다음날 아침에 찰칵

    I like soccer, not gun

    저건 민이가 만든 거에요. 바탕색깔 조합이 곱죠?

  • tono formal y 어투

    No sé por qué, pero el texto que sigue a continuación del esquema sólo no se ve correctamente en IE. (al parecer el primer párrafo desaparece tras la imagen)
    이유는 파악이 안 되고 있지만 차트 다음에 나오는 글은 IE 에서 올바르게 표시가 안 됨. (첫 문단이 이미지 뒤로 밀쳐나는 듯)

    En KIWA sacaron un informe blanco (“white paper”) para poner presión en los medios para su Campaña por Salarios Justos, cuya traducción me encargaron como mi primer tarea de voluntario. Al comienzo de la traducción al coreano, tuvimos unos minutos de miscomunicación sobre el uso del tono para el coreano. El coreano no se puede conjugar pasivamente, por lo cual se debe decidir básicamente entre el -하다 (el formal e irrespetuoso) y el -합니다 (el informal y respetuoso) – hay más tonos, pero estos dos son los básicos. Yo estaba pensado más por el lado de si el tono debiese ser respetuoso o irrespetuoso, por lo cual mi debate estaba por el axis verde-amarillo, y pensé que un informe blanco debiera tener un tono respetuoso, por ende mi opción por la -합니다. Pero al mismo tiempo había visto que informes y publicaciones nunca tenían el tono de -합니다 sino -하다 porque ese era el uso común.

    Pero mis supervisores estaban más preocupados de si el tono era formal o informal, porque el informe tenía un tono oficialista, aunque a la vez no tan sólido como un informe blanco, pero al medio como fuente para medios de comunicación. Cuando les expliqué la clase de coyuntura en que estaba, les dije que -하다 era como el tú, mientras que la -합니다 era como el usted. (Esto es, siguiendo la axis verde-amarillo) Y ahí a ellos se les encendió el semáforo rojo porque estaban conscientes que “tú” era informal, mientras querían un tono formal (“usted”, la cual según mi analogía de respetuoso-irrespetuoso, debiera ser -합니다) Me dijeron que querían el que sonaba como “usted”, o sea -합니다.

    En esa discusión nos pasamos varios minutos, porque yo mismo estaba confundido sobre por qué la percepción del tú y el 하다. Al fin me di cuenta que estábamos interpretando la significancia del tú con diferentes estándares (ellos buscando el axis rojo-azul, mientras yo estaba enfocado en el amarillo-verde) Y aunque ellos no quedaron muy convencidos, les expliqué que aunque -하다 era irrespetuoso, a la vez era el tono “formal” que ellos buscaban.

    KIWA의 생활임금 켐페인 백서를 자봉 첫 일거리로 번역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매체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마켓 소유주에게 대한 압력을 계속 넣으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족어로 번역할 때 담당자들과 약간의 이견이 있었는데 한족어는 원문 영어나 까스떼야노와는 다르게 동사가 passive 형태를 못 지닌다. (할 수 있긴 한데 어색해서..) 그래서 어투를 가지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하다 와 -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 어투를 주로 쓴다. 내가 알기로 -하다 는 경어이면서도 공식문서/논문/신문에서 두루 쓰이고 -합니다 는 존칭어투이면서 조금 더 느슨한 텍스트, 이를 테면 상업적 광고등에 쓰인다. 백서를 번역하며 어투를 고를때 이러한 경칭/존칭의 (초록노랑) 관계를 중점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합니다 가 존칭임으로 이것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이것은 광고지 보다는 신문 심층 기사에 더 가까움으로 -하다 널리 쓰이는 -하다 어투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당자를 불러서 물어보기로 했다. 담당자는 동남아계-아메리칸이었음으로 이해하기 쉽게 -하다 투가 “tú” (너) 이고 -합니다 투가 “usted” (당신) 이라고 비교해서 설명 해주었다. 하지만 담당자들은 이 문서를 공식적인 어투로 번역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빨강파랑) 그렇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또는 캐쥬얼한 (informal 이라는 단어 자체가 약간 중의적이다) “tú” 의 사용을 경계하고 공식적인 “usted”에 해당하는 “합니다”를 사용하라고 충고해주었다.

    몇분 동안 문제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본 후 내가 “tú/usted”라는 비교 대상을 제안할 때 그 어투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헷갈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경칭존칭의 대립에 중점을 두고 있었지만 그들은 공식비공식의 대립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카스떼야노에서 경칭존칭과 공식비공식은 (어느 정도 선 까지는) 서로 평행을 달리지만 한족어에서는 서로 교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경칭이 공식적인 어투라니? 혹시 기존 집권 세력이 싸가지가 없게 굴어서 그렇게 되어버린것 아닌지 모르겠네.

  • 일은 누가 한다냐

    http://www.emusic.com/album/10729/10729166.html (더 보기…)

  • [번역]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번역 작업사이트: w.yokim.net/White_Nationalism_and_the_Multiracial_Left

    세상 크게 보기: 마이클 무어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한국어 번역]
    케년 훼로우, 길자 김

    Connecting the Dots: Michael Moore
    White Nationalism & the Multiracial Left [korean translation]
    by Kenyon Farrow and Kil Ja Kim
    nathanielturner.com/connectingthedots.htm

    2004년 6월 9일

    영상작가 및 평론가 마이클 무어가 [미국] 좌[익]의 깡패로 변하는 것에는 겨우 십년 밖에 걸리질 않았다. 혹자는 뉴욕타임즈지의 베스트셀러를 두권이나 출판하며 2003년 총기산업을 다뤄서 오스카 다큐 대상을 받고 금년 깐느 축제에서 부씨를 비판하는 화씨 9-11로 최고상을 받은 무어를 좌익에 포함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마이클이 “진보”, 또는 “급진”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디즈니사 CEO 마이클 아이스너가 화씨 9-11을 막아버린 이후 영화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다큐를 배포하겠다고 나선 데 있다. 결국 그가 주류 미디어계에 갈채를 받으며 (깐느에선 장장 이십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낌을 받는 깡패가 된 것은 그를 바라보는, 주류 정치담론에서 배제된 수많은 좌파인들에게서 홀대받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무어를 좌파정치와 연결해서 보는 것은 “좌익”이 의미하는 바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좌익 내부의 향방이 무어의 방법에 복선으로 깔려있는 상태를 문제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마이클 무어는 백인 국가주의자일뿐 이다. 그의 백인국가주의적 접근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생각하는 이들과 제도화된 좌익을 연결시키는 점이다.

    혹자는 “급격한” 단체들에게 허용되는 백인 국가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헷갈려하실수도 있겠다. 우리가 보기에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은 미국내 사회관계에서 이미 정상적인 것으로 전략한지 오래다. 백인들의 역사와 경험에 근거한 국가형성 계획이 우리가 말하는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이기 때문이지. 백인국가주의는 그저 백인중심의 사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백인 국가의 (이는 정부가 합의한 변경을 따르거나 사회상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일수도 있겠다) 지속 및 확장을 백인의 근심, 걱정, 공포 및 욕심등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백인국가주의 담론은 백인성과 미국시민사회,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시민권의 인종 계획화 및 성적계획화를 지나치곤 만다. 백인 국가주의적 접근의 첫 시발점은 “백인이 자신의 국가를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이다. 고로 백인국가주의 계획의 시선은 정부세력, 민중으로부터 발생하는 “반항성” 또는 세계 경제의 흐름중 어떤 면이 백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느냐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무어의 작품을 잘 살펴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는 주제가 백인 시민의 잃어버린 권리와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란 것을 알수 있다. 미시간주 플린트시의 자동차산업 대량해고나 무기산업, 2000년 대선 무효나 미국애국법 [USA PATRIOT Act]를 다루며 이들 문제가 유색인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무어는 이러한 문제가 문제 자체가 되는 이유를 백인 시민/노동자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멍청한 백인”의 개론중 무어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미국인들은 다 누군가가 우리의 밤샘 잔치의 전원을 뽑았다는 것을 안다. 미국의 세기는 다 갔다. 21세기 악몽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러한 “미국의 세기”가 끝났음으로 제시되는 이유들로 선거부정을 저지른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것, 일자리들이 [주로 전문직] 축소 및 해외수출되고 있다는 점, 주식 시장이 호황이 아니라는 점과 집 주인들이 융자금을 갚기가 어렵다는 점을 든다.

    이러한 백인 중산층류의 불평불만은 “친구야, 내 나라 어디로 가뿌렸나?” 에서도 확연하다. 제목만 보아도 백인 국가주의 이념에 핵심 역할을 하는 소유 및 권익 정서를 표현하지 않나? 9-11과 이라크 전쟁에 촛점을 두는 “친구야…”는 정경유착과 미국 시민/노동자의 낮아지는 임금/구매력에 대한 비판이자 국가의 “개혁 가능성” 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다.

    중산층이 집 구할때에 융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현실에 대해 불평하거나 2004년 대선에서 부시를 넘어뜨릴만한 이들을 선거장으로 끌어내는 일에 있어서 무어는 (노예가 아닌) 시민의 [여기서 “비노예 시민”은 백인을 가리킴] 공화국을 개혁할 능력에 대해 긍정적이다. 하나의 주장을 끝 매듭지으며 무어가 하는 소리를 보시라 “어떤 나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 그런 나라는 또 없습니다…. 아주, 아주, 자유개방적이고, 해방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는 이 나라… 이 빨갱이 낙원의 이름은 다름이 아닌 미대륙합중국 이라지요!” 무어의 이러한 긍정성은 자신의 인생 자체가 미국 비백인의 경험과는 다른 백인의 인식에서 근원하는 것 자체에서 백인중심적이지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백인우월주의적인 정부와 백인 시민성에 대한 베팅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무어는 결코 “미국 국가의 계획” [the American project] 상 “시민” 또는 “국가” 같은 개념들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어떻게 건축되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 발드윈 [James Baldwin]이 “백인공화국”으로 축약한 그것에 상기 개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지 프랑크 리흐 [Frank Rich]의 [그 또한 백인좌파엘리트이지만] 말을 빌리자면 무어는 “everyman” [소시민] 이다. (이 또한 인종차별주의 및 성차별주의적인 용어이며 백인 남성을 위해 거의 집중적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실제로 소시민 이든 아니든 그가 백인시민의 국가정부내의 접근권 및 포함됨을 급진적인 변화에 우선함은 확실하다.

    무어가 국가정부와 포함됨에 집착하는 것은 그가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미제국의 지배정책 등등의 미국계획을 실제로 의문시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무어에게 있어서 “실상의”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은 기업 견제, 공권력과 이를 지지하는 특정이권그룹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유한 백인남성 (또는 “멍청한 백인 남성”) – GM사의 회장 로저 B. 스미스, 록히드 마틴사의 관료 에반 막컬룸, NRA 활동가 차를턴 헤스턴, G.W 부시와 딕 체니 – 및 그들의 욕심에 피해를 보는 백인 중산 및 노동자 계급에 촛점을 맞출 뿐이다. 무어는 자본부의를 그 자체로서 억압적인, 특히 비백인 인구에게 그러한 체제로서 비판하지 않고 그 대신 부유한 백인남성들이 그렇게 욕심쟁이이지 않기만 하다면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분석한다. “멍청한 백인 남성” 논지의 전제는 결국 자신의 동포인 중산층 및 노동계급 백인들과 소유를 공유하며 그들 또한 미국 계획의 산물을 누리도록 해야 하는다는 것인 것이다.

    무어식의 부패한 개인들을 문제화 하며 동시에 부패한 제도를 (기업 또는 정부 등의 구조에 의해서 현실화되는) 문제화 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백지수표를 내주는 것과 다름없을뿐만아니라 내부 차이에도 불과하고 백인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협력해서 백인우월주의와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을 통해 모든 형태의 억압을 지탱하는 현상을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거한 그들의 백인우월주의 및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은 동시에 그들의 반흑인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에 대한 투자를 나타낸다.

    1787년 헌법 모임의 토론에 나타났듯이 미국에서의 시민권이란 개념은 원래부터 노예화된 인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시민” 또는 “자유로운” 사람은 특정인종과 성의 테투리 내부에서 시민사회에 참여할수 있었다. 이 구조는 반개념 [antithesis]인 노예의 개념에서도 적용된다. 여러 사회 그룹이 노예 제도 또는 토지에 포함된 하인 생활에 얽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만이 평생 노예로, 다시 말하자?자유와 공(共)화국의 [re/public] 참여에 합당하지 않는 인종으로 이해되었다. 합법적 노예제도 시대 동안도 몇몇 안되는 “자유로운” 흑인들은 끊임없이 노예로 복귀시키겠다는 협박 및 폭력 그리고 실상 및 실법 차별아래 있었다.

    오늘날 미국이란 계획이 여러 인구들을 섭렵하면서 백인 공(共)화국을 다인종 공화국으로 만든 이후에도 흑인성은 시민성 또는 “흡수될 만한것”의 경계선 바깥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하여 시민성의 사유의 주체의 반개념으로 작동한다. 비흑인 유색인종의 시민권이 원래 희미하며 결코 백인시민권의 위치에 필적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도 흑인성은 반-시민으로 작용하여 다인종 미국계획에 뚜렷한 경계선을 제시한다.

    무어식대로 시민권과 민주주의에 투자를 하자면 죠이 제임스가 [Joy James] 지적한 것 처럼 미국 사회만큼 철저히 인종세분화된 사회에서 “범죄성, 반사회성, 부도덕성 그리고 부패가 흑인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현상”을 문제화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무어가 이런 방식의 분석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백인 군인의 가족원을 인터뷰 할 때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왜 그들이 총에 집착하는 지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그들이 왜 자신을 “범죄자” 또는 “침입자”들을 상대로 보호해야 한다며 무장해야 하는 지 설명할때 무어는 그 “범죄자”는 분위기상 흑인을 가리치는 것임을 문제화 하지 않는다.

    이렇게 잘 조직된 반정부 군단체들이 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왜 젊은 표범당 [Black Panther Party]나 미 원주민 운동 [American Indian Movement (AIM)] 같은, 호전적인 백인정부와 시민사회를 향해 무력해방시도를 주도한 단체들은 FBI 첩보원, COINTELPRO 등의, 흑인 및 미원주민 공동체를 분쇄하려는 수많은 조직들에 의해서 구조적 및 폭력적으로 해체당하면서도 무어는 그러한 파괴를 주도한 정부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비판을 가하는가?

    다시 설명해보자. 무어가 자신을 포함시키는, 그리고 좋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백인시민대중은 동시에 흑인 및 원주민을 억누르는 백인국가정부의 보호를 받는다. 억압의 형태는 대게 급진주의를 제거하거나, 공공교육예산을 감축하거나 게토와 가난한 농지에 여러 종류의 구조조정 정책을 감행하거나 가난 및 중독을 범죄화 하거나 (그러면서도 마약 거래는 조장하고!), 공공 주거지역 및 원주민 구역 그리고 경찰력을 통한 억압 및 대규모 감옥화등을 지닌다.

    우리들이 무어가 반흑인 계획을 추진한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불공평하다고 할지도 모르겠군. 그의 저서와 영화속에서 무어는 노예 제도, 인종검문 및 감옥화등을 다루지 않던가? 라고. 물론 그러하긴 하지만, 무어는 그러한 비판이 그의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흐트리지 않는 수위에서만 문제제기를 할 뿐이며 오히려 그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인종차별적인]상황이 전제되어야만 대중이 지지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백인 시민/노동자/반기업 주체가 존재할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종종 무어는 이러한 패러다임에 들어맞는 비백인들에게 그의 지지를 보내는데 바로 이러한 “너그러움”이 있을 수 있다는 상황 자체가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의 협력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백인국가주의와 다인종 공/화국에 대한 지지와 공존 하는 예시로 “친구야…” 에서 9-11후 중동 및 남아시아 발 이민남성의 이유 없는 수색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국가 보안의 비호 아래 비백인을 도매로 잡아들이는 것은 백인우월주위라는 점에 대해 동의 할수는 있지만 우리는 무어가 이민자들을 변호하는 방식을 문제화 한다: “많은 사람들을, 그들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 할 만한 이유도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비-미국적이다 [un-american]”. [번역 주: 비미국적이라는 단어는 9-11 후 이민자들과 외국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을 국내 정책 담론에서 소외시키기 위한 부시의 매체 전략이었음] 이 선언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람을 특정 이유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매우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투옥율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것을 생각하자면 말이지.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무어가 비백인 이민자들의 투옥 및 추방을 문제화 할 때 그 논리에 깔려있는 전제는 “범죄적” 인체는 “위험하고” 그로서 그들은 투옥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노예 제도가 끝난 후 미국의 흑인들이 다른 인종 그룹과 비교 할 때 압도적인 비율로 투옥된 점, 그리고 “자유 서방”에서 흑인성은 경찰이 훈련을 받을 때 범죄자의 기본 형태로서 제시된 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무어가 이민자들의 불공정한 투옥에 대한 가하는 비판은 이들 이민자들이 “진짜 범죄자” (말하자면 흑인) 가 아니면서도 범죄자인 마냥 다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읽을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흑인의 위치성을 사회 구조의 필요조건으로 읽는 대신 이를 가져와 결백에 대한 이야기를 풀려 쓰는 것이다.

    무어와 그가 지지하는 다인종 좌익 사이에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이들은 공유하는 점 또한 지니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멍청한 백인 남성”을 비판하는 진보 운동은 흑인성에 대한 공포에서 그 원천을 찾는 다고 할수 있으리라. 쉽게 말하자면 흑인에 대해 관심은 없고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수 있다.

    미국의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자. 이는 다인종적인 노동조합, 이민 권익, 반 노동착취 [anti-sweatshop] 반기업 그리고 반 감옥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크 윌더슨은 [Frank Wilderson] “반 세계화 운동의 민주적 포퓰리즘은 이념 및 물질적으로 반흑인성으로 묶여있는데 이 반흑인성은 말하지 않고서도 이해되는, 그러면서도 필수적이며 광범위한 성질을 지닌다.. 반세계화 운동이 흑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이들이 난민일 경우 일 뿐인데 이 경우 그들은 다른 이의 사업에 무단침입한 것 뿐이다”라고 적절하게 기술한다.

    윌더슨에 의하면 반 세계화 운동에게 “가능성의 전제”로서 흑인의 죽음은 잭슨 민주주의에 [Jacksonian]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 이는 19세기의 전통으로서 “소시민” 백인 남성에게 백인 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시민사회와 시민 권리를 더 넓히려는 목적을 지녔다. 이 시도는 미국긍정이면서 반지배세력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반흑인성을 띄었는데, “소시민”의 권리창출과 자기 교육은 노예 제도 또는 노예화 된 비합리적인 대상의 존재 하에서만 형태를 갖출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잭슨 민주주의파 처럼 무어 또한 사회가 흑인의 위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에 의지해 지배 세력가 투쟁하는 것 처럼 보이는 “소시민”의 권리를 지지할 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허나 윌더슨이 지적하듯이 “오늘날의 반 세계화 운동과는 달리 잭슨파는 내놓고 그들의 백인 우월주의를 천명하였다.” 흑인의 죽음은 사회 기회와 사회 움직임의 가능성에 구체적 형태를 주는데 오늘날 다인종 정치의 세기에, 시민권 및 민주주의에 집중하는 백인은 흑인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멍청한 백인 남성들” 또는 “권력을 잡은 백인들” (이런 표현은 사실 필요하지 않는데도) 을 조롱하고 못박으면서 백인국가주의로 낙인찍히는 것을 면하고 동시에 소수의 유색인들에 (무어의 경우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 대한 지지를 표현할 수 있다.

    무어와 수 많은 좌익 운동은 공유하는 점이 크다. 오늘날 공(共)화국의 다인종 본질을 고려할 때 살아있는 제도화된 진보운동 중 명백하게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그러나 미국 계획이 흑인의 억압 및 죽음의 구조화 인것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진보 운동은 “멍청한 백인 남성”을 후리는 것에 있어서 무어와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

    오늘날의 다인종 진보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는 아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한편으로 미국 시민사회를 접근하기 위한 시도이며 반면으로는 흑인성의 저지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두렴움을 표현한다. 이런 성향은 대중의 시민권 접근성 및 시민/개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을 통해 확인할수 있다. 모든 좌익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무어의 계획과, 또한 19세기 잭슨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단순히 말해 반흑인 인종차별이다. 윌더슨은 이 문제에 대해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 “모든 반공적 정치 흐름이 백인 긍정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항상 반 흑인주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간단하게 말해, 다인종이던 아니던 어떠한 정치적 성향의 운동이라도 근본적으로는 미국 계획상의 흑인 위치성을 문제화 함으로서 급진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대신 그 흑인 위치성에 의지해 정치세력화를 꽤하며 시민권, 민주주의 그리고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운동가들에게 놓인 과제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어떤 방법으로 무어 성향의 반흑인 인종차별 및 성차별 그리고 백인 국가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을 피하는 가 하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흑인의 생물 및 사회상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고 시급한 이슈를 위한 지지/자금을 구할 것인가? 백인 국가주의 속성상, 비흑인들은 어떻게 하면 흑인 범죄수의 상(狀)을 자신의 안티테제로 제시하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며 결백을 증명할 것인가? 흑인의 사회적 위치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를 흔드는 과정으로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문제화 할수 있는가? 그러한 시도는 어떠한 형태 또는 담론을 지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국가주의/다인종 정치의 시대에 “좌익”으로 이해되어지고 씌여지는/출판되는/소비되고 제도화되는 정치 언어, 정체성, 운동에 대한 신념과 염원의 재 구조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과제일수 가 없다. 그러한 재구조화를 위해서는 이미 정착된 담론과 제도화된, 진보적으로, 급진 또는 혁명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정치 형태를 문제화해야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은 마이클 무어등의 정치계획을 포함하는 제도화된 좌익 담론을 비판적으로 상대하며 때가 되면 그 테투리를 넘어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 * *

    케년 훼로우 [Kenyon Farrow]는 뉴 올리언스 [New Orleans]에서 활동하는 필자, 운동가 및 연출가이며 길자 김 [Kil Ja Kim]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활동하는 연구자, 교육가 및 운동가입니다.

    원 저자 연락처:
    Kenyon Farrow kenyonfarrow@hotmail.com
    Kil Ja Kim kiljakim2003@yahoo.com

  • [번역]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번역 작업 사이트: w.yokim.net/ExposingWhiteness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한국어 번역]
    백인성을 들추어 내고 그리고 비백인 공간을 모색 하며
    데이빗 뢰디거

    I CAME FOR THE ART [korean translation]
    Exposing Whiteness and Imagining Nonwhite Spaces
    by David Roediger
    artpapers.org/feature_articles/feature1_whiteness_M_J_03.htm

    다음 글은 현재 라구나 예술관 [Laguna Art Musem] 에서 2003년 6월6일 까지 전시중인 “백인성, 먼길의 구조[A Wayward Construction]”의 카탈로그를 위한 데이빗 뢰디거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백인성의 정체성 정치역학과 문화이론을 모색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인 이 전시회는 세 부분 – “White Out [“백인은 나가라” 또는 “하얗게 닦았네”], “거울, 거울…” 그리고 “백인성의 회색화”로 나뉘었습니다. 뢰디거 교수님의 글은 이 중 두 번째 부분 [거울, 거울..]에 대한 입문입니다. 편집부는 이 글을 위해 도와주신 전시회 장 타일러 스톨링 [Tyler Stallings]님과 라구나 예술관의 스튜어트 바이어 [Stuart Byer]님 및 데이빗 뢰디거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라구나 예술관 (www.lagunaartmuseum.org) 협찬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예술 세계에 발을 담갔을 때에, 열 살이 채 안되는 소녀가 가장 인상적인 한 마디를 남겼다죠. 그때 참말로 얼마나 백인성이 유리하고 유리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내가 세인트 루이스 [Saint Louis] 시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자그마한 예술관에 연설하러 갔을때 말이죠.. 때는 Ron Sakolsky의 최신 모음집 “초현실주의적 반란들” [Surrealist Subversions] 의 기념이였고, 난 1929년에 있었던, 세상을 백인주의를 넘어서 보려던 초현실주의 시도에 대해서 짤막한 연설을 준비했더레요. 아무래도 Yves Tanguy 님이 그린 것 같은 이들의 주요 작품 중 하나는 대서양이 아니라 태평양이 중심인 세계지도였어요. 이 지도를 보고 우리 아이가 “그거 왜 그리 후졌냐” 그랬어요. Tanguy 는 미국과 영국을 축소해버리고선 오세아니아를 확대했어요. 제가 원래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 작품이 표현하는 세계를 바꾸지는 못했다면, 적어도 우리들이 얼마나 과잉개발된 백인 세상에 집착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할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존 훼오도로프, 사무실 무당, 2001, 여러 재료
    John Feodorov, Office Shaman, 2001, mixed media, variable dimensions (courtesy the artist).

    아무래도 이 이벤트가 동네 축제 [homecoming – 미국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매년 모여서 미식 축구 보는/하는 행사]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니 좀 더 연설을 개인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리 준비한 것은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예술관은 제가 자라난 동에 위치해 있었고, 동네의 여전함과 급진적 변화는 제 혀를 자극했지요. 여름철 무더위와 미시시피 강 특유의 습도,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밖에 나와서 빵 굽는 벽돌위에 있는 풍경도 너무나 친근했죠. 고기 굽는 냄새는 아직도 술 빗는 곳의 악취와 마구 섞이고. 한 때 백인 다수이고 당당하게도 분리주의자였던 이 지역은 많이 [인종적으로] 섞이게 되었구.. 바로 풍覺?서쪽에 있는 쇼핑구역은 생명력 뛰어난 라티노 거점을 형성했고, 흑인 가정들이 늘어나면서 앞뜰과 뒷마당에서 고기 구워먹는 것과 더위를 피하는 것도 더 사람다와졌더라구. 오랫동안 북/남을 기준으로 분리되어있던 도시는 이제 남쪽의 깐깐하기로 소문난 동네에서까지 인종적으로 섞인 골목들이 생겼더라고.

    예술관 내의 다양함도 그에 못지 않았어. 호화롭게 치장한 예술 애호가들과 동네 젊은이들이 꾸역 꾸역 몰려들고 연설자 목소리가 들리라고 선풍기를 고맙게도 (?) 꺼 주니.. 그 열기가. 난 어떻게 실생활이 인종의 어리석음과 폭력을 비웃고 몇몇 백인들이 사는 비백인 공간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리저리 회상을 내비쳤어. 연설이 끝나고 예술관 주인과 나는 바깥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며 동네가 얼마나 바뀌었는 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 주인은 다인종 주민들의 연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날 즐겁게 해주었어. 그리고 우리는 무너져가는 벽돌 건물에 도착했는데, 여긴 아마추어 역사가들이 옛날에 지하 철도 [underground railroad – 노예 제도 시대 흑인들을 북쪽으로 빼돌리는 연결망] 의 거점으로 사용‰榮募 것을 증명한 적이 있어. 요즘 이곳 운동가들은 개발자들과 싸움이 한창이야 – 개발자들은 땅 좀 치우고 건물 짓자고 난리지, 운동가들은 여길 역사 보존 지역으로 만들자고 하지.. 노예 시대의 성스러운 비백인 공간이 이십일세기의 비슷한 공간을 형성하는데 일조한 셈이야.

    이 날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그게 아니고. 우리가 예술관으로 돌아오면서 열한살 정도 될까 하는 African-American 소녀를 만났어. 그녀는 개막식에 참석했다가, 집에 잠깐 들르고는 다시 돌아와서 아직도 행사가 진행중인지를 알고 싶어했어. 그렇다고 말해주면서, 과자도 있으니 가서 음식이랑 과자랑 집어가라구 그래줬어. 그랬더니 얘가 뭐라는 줄 알어? “과자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아주 강경하게 말이야 –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오호, 이 예술관은 졸지에 공동체 종합 예술 센타로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구나. 세인트 루이스의 가장 백인적인 공간 중 하나가 더 이상 그렇지 않고, 예술이 그 과정에 영향을 끼친 게야. [번역 주: 미국에서 예술은, 그것이 비싸던 대안이건 무료이건 저항 예술이던간에, 백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럼으로 인해 유색인의 대중적인 인식도 이에 제한되고]

    즐거움은 예술관 주인이 계속 얘기하면서 줄어들었지. 그의 말에 의하면, 도시 관리들은 유적이 지하 철도이건 아니건간에 싹 철거해 버리고 건물을 짓자는 대에 대해 아무 문제 의식을 못 느끼는 것 같았어. 아이러니 하게도 마약상, 포주와 창녀들을 성공적으로 다른 곳으로 보낸 다인종 연대는 그 값을 치뤄야만 했어. 자산 가치가 올라갔는데, 연대 구성원들은 집세를 내는 처지였어서, 갑자기 세가 세 배로 오르는 경험을 했지. 부동산 업자들은 이제 그 동네를 가까운 곳에 있는 분리주의 지역의 일부분인 것 처럼 소개를 했고, 재치료 매상은 폭락했구. 이 얘기를 들으며 전시회에 모인 위스콘신, 일리노이 및 미주리에서 부터 온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싼 전세를 원하는 예술가들이 가끔 “백인쪽으로 가는” 분리주의를 시작하는지에 대해 얘기를 했어. 어떤 이들은 다인종 동네 주민들에게 강도를 맞이하는 것이 콘도미니엄 개발자들을 맞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인 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산 가치를 일부러 낮춰버리면 (예를 들면 낙서 같은 전략) 그게 공동체 형성과 공존할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그 날 밤에 우리는 비백인 공간이란 것이 가능하면서도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에 대해서 배운것이야.

    수년 전 부터 기자들이 내게 던진 몇 가지 좋은 질문에 대해서 생각 해오고 있었다. 하나는 BBC 국제담당 기자가 생중계 인터뷰중 물어온 것인데, 좋은 의도를 가지고 백인다수인 청취자들에게 미국 백인성 비판적 연구의 핵심을 소개 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누가 미국에서 제일 백인스럽냐고 물어보았다. 망설이지 않고 “러쉬 림보 [Rush Limbaugh]”라고 대답하며 그가 흑인 구술 전통 [African-American speech] 중 minstrel show [노예 제도 시대 중 백인들이 얼굴에 검정을 칠하고 흑인 흉내를 내며 유희를 즐기던 연극 형태]와 유사한 점은 억제해 버린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게 왜 흥미로운 선택이냐 하면, 림보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희안하게도 표면상으로는 색깔 없는 것을 아주 대담한 인종 차별과 조합하기 때문이다. (1) 대답후 아차!, 하며 백인성을 보수주의, 남성성 및 의도적 인종 차별과 너무나도 가볍게 동일시 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빌 클린턴, 빌 게이트나 마돈나의 숨겨진 백인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마 백인 정체성이 문화 감각의 저 너머에서 정해진 기준과 스스로를 인종적으로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힘의 관계로서 작용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 더 도움이 ‰瑛만라.

    월스트릿 저널 기자에게서 받은 두번째 질문은 너무 친숙하고 명석했다. 우리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던지 그의 기사는 학계의 백인론을 바보로 만들어 버릴 것이란 것에 대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일부러 비판적인 그의 질문 –“미국에서의 백인적 공간을 찾으실 수 있나요?” –의 이면에는 백인성과 예술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쓸만한 문제가 포함되어있다. 당시에 우리가 위치 해 있던 미네소타 주를 언급하려는 유혹에 잠깐 빠져들었다가 그 대신 미국 몰 [Mall of America – 미네소타에 위치한 쇼핑몰로 미국 최대 규모임] 을 골랐다. 넓은 의미로서의 백인성-도회지-소비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훨씬 더 직접적인 형태의 인종차별 – 저녁이 되면 보안 관리들을 동원해서 흑인 꼬마 아이들을 몰에서 못 들어오게 하려는 조치 – 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좀 의외로 나의 두번째 대답은 인터넷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경계선이 녹아 없어지는, 인종 없는 테크노피아로 여겨지지 않던가? 사실은 영원토록 백인의 영토였으면서 말이다. (인터넷에서 “다인종 [interracial]” 을 찾아보면 미국의 인종/성 관념을 재활용하는 수천개의 포르노 사이트가 뜬다)

    BBC와 월스트릿 기자의 질문에 대해 몇년간 생각 해 본 이후 이제 나는 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백인스러운 사람: 마르타 스튜어트 [Martha Stewart] (그녀의 복잡한 백인 배경은 현재 그녀의 주식시장 부정과 동시에 조사되고 있다) 와 에미넴 [Eminem]; 콜린 파월 (이 사람의 이름은 내가 어딜 가서 “누가 가장 백인스러울까요?” 하고 물어보든 빠지는 날이 없다) 와 로라 부시 [Laura Bush]; 건설 업계 쪽의 노조 지도자중 아무나,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톰 브로커 [Tom Brokaw]와 , 윌리엄스 동지와 마티나 힝기스의 태니스 시합이 있을 때마다 그걸 체육 대 지성의 대결이라고 왈왈거리는 테니스 해설자. 이제 백인적 공간을 함 볼까? 월 스트릿과 NASCAR 이벤트; 유색인들이 제외 되는 클럽장과, 그들을 가두는 슬럼가 [barrio]; 교육 기관과 주류 교회들; 백악관 [아니라는 광고에도 불구하고] 와 베네통 [Benetton] 가게; 국가 미식축구 협의회 경기장과, 거, The O’Reilly Factor [미국의 인기있는 토크쇼]를 주최하는 놈 – 그 놈의 양 귀 사이에 존재 하는 공간.

    이렇게 다양한 명단이 존재함으로, 백인성을 들추는 것은 복잡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작가 및 운동사 아모자 세개의 강 [Amoja Three Rivers]님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상, 백인성은 “정치 연합”의 형태를 지니고 발전하였다면, 이는 힘, 민족, 성정체성, 스탈, 종교, 나이 및 젠더등에서 각각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것이다.(2) 법학자 체릴 하리스 [Cheryl Harris] 가 백인성이 그 주인들을 모여주게 하는 소유의 일종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가 동시에 증명하는 것은 [인종적] 소유는 다른 형태의 소유를 아주 많이 가진 자들이 가장 아쉬워 하고 동시에 –비극적으로- 자신들이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여서 백인성에 그토록 매달리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3) (백인들에 의한) 백인종 내부에 존재하는 다름과 비합리성에 대한 투정은 표면상의 일치와 새로운 문제들을 동시에 야기하므로 백인성을 간단하고 한마디로 설명이 되는 듯이 축소해버리는 이론만 가지고는 더 이상 건설적이지 못하다. “그 누구도” –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가 그런 적이 있지- “한 가지 [정체성] 만 될수는 없다”.(4) Kavin Buck과 John Feodorov의 작품이 보여주듯 예술이란 것은 흑인 여성주의자들이 적절하게도 “정체성의 [다중]동시성”이라 부른 그 무엇을 제대로 조명할 수가 있다.(5)

    에밀리오 꾸에또, 가버려따, 2002, 유화, 84×60 인치 (예술가 및 Los Angeles, Newspace 예술관 협찬)
    Emilio Cueto, Gone, 2002, oil on canvas, 84 by 60 inches (courtesy of the artist and Newspace Gallery, Los Angeles).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백인성을 들추면서 더욱 더 복잡해지는 것은 “백인” 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의미하는지, 인종이 아닌 것 처럼 보여주는 때 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에밀리오 꾸에또의 날카롭고 거의 전체가 백색인 “가버려따” (2002)는 여러 겹의 의미를 괘뚫는다. 물론 인종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만, Piet Mondrian 같은 이들의 작품과도 일맥상통한다. Mondrian은 백색을 다른 전제 하에 사용하곤 그의 작품에 대한 [다른 이들의] 읽기는 거의 인종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꾸에또의 작품은 우리들에게 인종으로서의 백인성과 그 밖의 공백성, 부드러움, 비어있음, 차가움, 죽음, 순수, 자아 발견등등의 백인과 관련된 것들과의 연결점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그런 연결의 방향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헤르만 멜빌[Herman Melville]이 이미 백오십년 전에 제시한 모비 딕의 소설 속의 “고래의 백인성”, 그리고 “하녀들의 타르타러스 강” [The Tartarus of the Maids] 에 나오는, 차갑고도 천천히 죽어하는 공장 여자 노동자들의 백인성 – 꾸에또는 색상을 인종을 초월하는 기표로 사용하면서도 그 인종적 의미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질문은 아마 “가버려따” (제목 좀 보시라!) 가 묻는, 캔버스가 항상 백인적인 공간인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아니라고 선언했을때만 결국, 그리고 혹시는 그러한 후에도 항상 백인적인 공간인지 물음일 것이다. 순수히 물리만을 생각한 것이 아닌 사회 관계를 고려 했을 경우, 캔버스라는 것이 다양한 색상과 그림들을 취한 후에도 밑바닥은 백인적인 것인가? 할리우드의 회색 스크린 처럼, 끝끝내는 흰색이 되는 것인가?

    백인성을 들춰내는 일을 좀 더 배배꽈보자. Richard Lou와 Robert Sanchez의 “미친 인류학자들” [Los Anthropolocos – 인류학자 Anthropologos와 미친 이들 locos의 합성어] (1992)와 Mark Greenfield 의 흑인 연출 [blackface minstrelsy] 에 대한 단상은 참 골치스럽다. 적어도 백인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하다 – 또는 그 누구라도 미국 문화를 탐색하는 이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백인 우월주의가 주류 인종이념 뿐만 아니라 “건너도 되는” 인종선의 넓은 경계를 이미 오래 전 그려 놓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Susan Gubar 의 “인종갈아타기” [racechange] 에 대한 연구 결과를 재확인 시켜준다. “Ch.D.s” (“치카니즘 박사들” [Doctors of Chicanismo]) 으로 등장하는 Lou 와 Sanchez는 누가 [인종적 선을] 건너는 것이 허락 되는냐하는 문제, 그리고 누가 누구를 대표할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후기식민지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미친 인류학자들”은 불변하는 감각과 구조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Greenfield가 씹어대는 minstrel 연기자들은 결국 관객 앞에서 화장을 하거나 지우거나 (또는 흰 손을 보여주기 위해 장갑을 벗는 다거나) 를 할 것인지 결정 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서 그들의 백인성을 완전히 드러내고 아주 적절하게 인종 건너기의 과정 자체를 지배하는 것이 연극의 일부였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 아닌가?

    피터 에드룬드, 노예 주의 정부 새 (J.J.Audubon 다음), 2001, 유화, 40×28 인치 (예술가 협찬)
    Peter Edlund, State Birds of the Slave States (After J. J. Audubon), 2001, oil on canvas, 40 by 28 inches (courtesy the artist).

    역사를 재 구성 하는 것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부분은 최근 성숙해가는 노예 제도와 Jim Crow 제도 보상에 대한 논쟁의 관점에서 볼 때 크나큰 정치적 의미가 있다. Peter Edlund의 아름다운 “노예 주” 새의 형상화는, 이 새들이 십구세기 John James Audubon이 기획하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예술과 분류화 작업, 과학, 자연 그리고 (Audubon 의 관점에서) 다중인종의 일을 백인의 것인 마냥 지나친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합성은 다시 무엇이 “인종적”이며 무엇이 아닌 듯히 보이는 가에 대한 사색 그리고 백인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중요 지점에 묶여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힙합 시수로 “모든 노예의 이야기는 현재형 동사를 쓴다”(7) 라고 하는 The Coup [곡 이름] 처럼, Edlund 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Kelsey Fernkopf, La Brea Faberge, 1999, mixed media,17 by 5 by 7 inches (courtesy the artist and Howard House, Seattle).

    역사를 재 구성 하는 것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부분은 최근 성숙해가는 노예 제도와 Jim Crow 제도 보상에 대한 논쟁의 관점에서 볼 때 크나큰 정치적 의미가 있다. Peter Edlund의 아름다운 “노예 주” 새의 형상화는, 이 새들이 십구세기 John James Audubon이 기획하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예술과 분류화 작업, 과학, 자연 그리고 (Audubon 의 관점에서) 다중인종의 일을 백인의 것인 마냥 지나친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합성은 다시 무엇이 “인종적”이며 무엇이 아닌 듯히 보이는 가에 대한 사색 그리고 백인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중요 지점에 묶여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힙합 시수로 “모든 노예의 이야기는 현재형 동사를 쓴다”(7) 라고 하는 The Coup [곡 이름] 처럼, Edlund 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John Feodorov, Erika Rothenberg 또는 Kelsey Fernkopf 의 일련의 작품들은 백인성을 일부분 농으로, 일부분 심각하게 일상화된 소비의 객체 사이사이에 위치시킨다. Fernkopf는, 백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온갖 똥 더미들을 던져줌으로서 독특한 방식으로 문제 제기를하는 것이다. 백인성과, 행복을 살 수 있다는 거짓 약속간의 연결을 펌프질 함으로써, “안전”과 “깨끗함”이란 단어를 말함으로써, 그는 James Baldwin의 저서 “입장료” [The Price of the Ticket] 에 집대성되어 있는 백인성, 하루 일상과 윤리에 대한 분석심리학적인 방법을 취해서 인종과 항문성 [anality?] 및 자본주의에 대한 에세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8). 그런가 하면 Kavin Buck의 백인성, 헤테로성 [straightness] 그리고 진일보의 상호 연관은 초현실주의자 Franklin Rosemont 의 최근 주장인 예술가의 책임중 하는 백인을 몽상에서 깨워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9)

    본 전시회의 “White Out” 부분에 약간 망설여 지는 곳이 있다면, 이는 두 분야에 걸쳐 나타날 것이다. 첫째는 백인 여성들이 지배적 인종 지위를 소유함으로서 그들이 힘을 지니게 됨과 동시에 찬양됨과 이등시민 지위에서 “보호된” 과정을 모색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미 학계에는Ruth Frankenberg, bell hooks, Lewis Gordon, Ida B. Wells, Audre Lorde, Kate Manning, Vron Ware, Louise Newman 과 Cheryl Harris 에 의한 백인 여성과 인종에 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예술 분야에는 이에 해당하는 주장이 존재 하지 않는 것은 좀 안타깝다.

    문학 비평과 사회과학은 높은 기준을 가지고 백인성을 공포의 종류로 이야기 해 왔다. Ralph Ellison 과 James Baldwin 에서 부터 Leslie Marmon Silko, Paul Gilroy 와 Cherrie Moraga에 이르는 일련의 작가들은 백인성이 자신 자체를 유색인에게 대한 무자비한 폭력 – 채찍, Ku Klux Klan, 점령군, 흑인 처단군 [lynching party], 노예 초소 [slave patrol], 감옥 제도, “소수자” 동네와 인디언 지역에 버려지는 공업 독소등등 – 으로 그려냈다. 이들은 또한 백인 의식의 비틀어진 형성 과정에는 이러한 테러 행위를 보고 그리고 행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흑인 처단군들은 현장에서 서로를 축하하고 점심을 먹고 가족 단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늘날의 [미국] 테레비전 국가는 백인 경찰이 젊은 African-American 남자들을 때리는 장면들을 슬로 모션으로 끝없이 본다. 많은 African-American 들은 이러한 공격을 테러로 느끼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운전 면허증을, 어떻게 꺼내야 혼수 또는 죽음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친다. [번역 주: 주머니에 손 넣으면 안 된 다지요] 이런 주제가 등장하는 라디오 토크쇼에 전화하는 백인들은 이러한 폭력을 경찰관이 “피부색을 막론하고” 문제 있는 아이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문제쯤으로 보는 대에는 참 재주가 뛰어나다.

    하지만 어쩐 이유인지 백인의 테러는 전시회에 그리 크게 나오지 않았다. Andres Serrano의 Klansman 시리즈와 James Casebere의 섬짓한 작품들의 예외가 있었지만. Casebere는 백인적 공간들을 –그 중에는 유색인들이 묶여 있는 공간도 포함되어 있다- 모색하고 해체하며 의문을 제기하기 위하여 여러 대륙을 포괄한다. 그 만큼 시의 적절하게 백인성과 테러를 역사 및 초국가적으로 묘사한 작품도 없다. 이 전시회의 괘도를 통해 우리는 백인성을 해체하고 그 정체성에서 출발해 더 나은 무엇을 수면에 떠오르게 할 수 있다는 암시를 읽는다. 허나 Casebere의 유령 같은 그림들은, 그리고 그가 말하는 백인성과 테러의 상관관계, 그리고 소유와의 관계는 그와 같은 수면 부상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모색하게 될것인지에 대하여 따끔한 일침은 놓는다.

    케이빈 벅, 무너진 계단, 2001, 고무와 나무, 바닥 설치물

    Kavin Buck, Collapsed Staircase, 2001, rubber on wood, floor installation, 48 by 120 by 72 inches (photo by Antony Photography courtesy the artist and South La Brea Gallery, Inglewood, California).

    우리가 들추고자 하는 백인성이 겨우 개인적인 문제 또는 몰이해 / 나쁜 습관 이라면 별 고민 없이 감성적인 만남을 추구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단정해 버렸을 것이다. 허나 백인성은 개발자, 상사, 공해자, 경찰, 노동 조합 지도자, 단체 리더 또는 선생들 사이에서 인식되고 지켜지는 인식적 틀 [category]로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틀로써 백인성은 African-American 젊은이들이 백인 젊은이 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일곱 배나 높으면서 동시에 흑인 가족이 일 달러의 자산을 쥐고 있으면 백인 가족은 육 달러를 가지고 있는 구조를 지탱한다. 이러한 구조는 백인성 내부에서 나타나는 개인적 다름을 차단한다. 이 구조는, 인종적 차이의 이념을 강화하고, 백인성의 선호도를 높이며, 과학과 예술이 이러한 인종차별적 거짓들을 깔아 뭉개는 현실 속에서도 건재한다.

    백인 우월주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이러한 전시회 아래 모인 총체적 재능 그 자체로는 가능치 않다. 할수 있는 것은 관객에게 백인성의 역학과 “별다른 것으로 표시치 않은 경우 백인”인 사회에서 사는 부작용을 이해 할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백인성을 노출시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캔버스, 예술관 또는 국가가 항상 백인 위주일 것이라는 패배주의를 경계하는 것.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은 월스트립 저널 기자의 질문을 넓히며 어떻게 하면 비백인 공간들을 찾아내고 촉진할수 있을 까 하는 질문을 품는 쪽으로 우릴 밀어줄수가 있어요. 구조적인 불공정함이 항상 그런 공간을 없애버린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Notes
    1. David R. Roediger, “White Looks and Limbaugh’s Laugh,” in Colored White: Transcending the Racial Past (University of California, 2002): 44–54. See also the important recent collection edited by Kymberly N. Pinder, Race-ing Art History: Critical Readings in Race and Art History (Routledge, 2002).
    2. Amoja Three Rivers, Cultural Etiquette: A Guide for the Well-Intentioned (Market Wimmin, 1991): 8.
    3. Cheryl Harris, “Whiteness as Property,” Harvard Law Review 106 (June 1993): 1709–91.
    4. Edward Said in a question-and-answer session at Macalester College, Saint Paul in 1999.
    5. See, for example, Rose Brewer, “Theorizing Race, Class and Gender,” in Theorizing Black Feminisms: The Visionary Pragmatism of Black Women, ed. Abena Busia and Stanlie James (Routledge, 1993): 16.
    6. Susan Gubar, Racechanges: White Skin, Black Face in American Culture (Oxford University, 1997).
    7. Boots Riley, “Everythang,” from The Coup’s CD Party Music (Tommy Boy, 2001).
    8. Richard Dyer, White (Routledge, 1997): 75–76, speaks succinctly to the psychoanalytical literature.
    9. Franklin Rosemont, “Notes on Surrealism as a Revolution against Whiteness,” Race Traitor 9 (summer 1998): 29.

    데이빗 뢰디거 [DAVID ROEDIGER] 는 일리노이주 Urbana-Champaign 대학의 Babcock 역사 교수입니다. 최근 저서로는 “채색된 백인: 인종적 과거의 초월” 이 있음다. [Colored White: Transcending the Racial Past] (University of California, 2002). [주: 이 교수는 백인론을 학문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교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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