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넓얕 장자의 철학 일부러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지대넓얕 – 장자의 철학

일부러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헤메는데, 사실 곤붕의 예나 537 밑에 0이 있으니까 유 밑에 무가 있다라는 라는 얘시는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장자의 이름은 들어보았어도 그의 철학 내용은 처음 접하는데, 곤붕 얘기는 장자가 사람들과 철학얘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의 경험에 병적일 정도로 매달려서 사고의 점프를 시도조차 하질 않으니 장자가 일종의 정신 훈련 삼아서 들려준 이야기가 아닌가. 인터넷에 사람들이 토론하다가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지 않은 면모를 지적하면 사람들의 반응 중 하나가 “woah.. mind. blown” 인데 바로 이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이걸 통해서 “내가 생각조차 못했던 이론/프레임이 존재 할 수 있고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이제 바로 장자가 곤붕 이야기 이후 들려줄 이야기이다” 라는 점을 전달하려는 것이라는 것. 그런데 왜 뜬금없이 태평양만한 새인가? 새라던가, 태평양 만하던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상상함으로서 멘탈을 산산조각 내주는 것이 목적이니까..

숫자 537이 500+30+7인데 0이 들어가니까 무가 있다는 소리는 일단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양자역학과 상대주의를 남용하는 것과 유사점이 보인다. 만일 이 예시에 아라비안 숫자가 사용되고 있었다면, 이때 당시에 아라비안 숫자는 (이 시대에 아라비안 숫자가 있기는 했는가?)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 이론에 해당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자는 그 최첨단 이론의 이미지에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비유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걸 사용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500에 “0” 이 들어간다는 순수히 syntax 적인 사실에 무슨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는게 좀 도를 믿습니까 류 같아보이지만 당시에는 아라비안 숫자 자체가 생소한 새 이론이었고 그 체계에 내포된 일반인의 당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전제 조건이 당대 철학자들의 이론 욕구를 자극한게 아닐까.. 20세기 후반에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을 접하긴 헀지만 완전히 이해를 하진 못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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