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보건국이 코로나바이러스 관련 연구를 하기 위해 랜덤으로 참가자들을 모집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내가 그 중 한명으로 초대를 받았다. 뭘 연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활패턴과 감염여부의 상관관계이려나? 웹사이트에 연구의 목적이 설명되어있는데 모호하게 적어놓아서 결국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궁금해서(심심해서?) 참여했고, 참가자는 혈액 샘플을 집에서 스스로 채취해서 보내야 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백신을 맞고 난 후에는 혈액샘플이 의미가 없지 않을까? 백신을 맞았으니까 당연히 항체가 생기니까.. 그러면 항체가 생겨버린, 말하자면 “오염된” 혈액이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초대는 4월 24일에 받았고 첫 백신 접종은 5월 1일이니까.. 그런데 초대를 수락하자마자 어떻게 딱 맞춰서 4월 30일에 채혈키트가 도착했다.
첫 관문은 웃기게도 채혈키트 우편물을 내 우편함에서 꺼내는 일이었다. 채혈키트는 단단한 마분지 박스 안에 담겨 오는데, 채혈 후 다시 샘플을 이 박스 안에 넣어서 반송하도록 되어있다. (아마 샘플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 박스는 우편배달부가 아파트 함 전체를 열고 넣을때는 딱 맞춰서 들어가지만, 내 개인 우편함을 열고 꺼내려고 하면 거기에 있는 아주 좁은 철제 테투리의 두께 차이 때문에 테투리에 걸려서 나오지를 않는다. 아무리 당겨도, 비틀어도, 돌려도 나오지 않아서 결국 봉지와 박스를 찢고 겨우 비틀어서 꺼냈다.
박스 안에는 연구 웹사이트에 입력해야 하는 피험자 고유번호가 있다. 그건 좀 의아했다. 이미 초청을 수락할 때 웹사이트에서 몇가지 인구정보 질문에 답했는데, 그걸 또 입력하라는 건가? 입력안한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입력하도록 조치가 되어있는건가? 그래서 종이 설명서를 읽었다.
채혈 절차는 돌이켜보면 비교적 간단한데, 10페이지로 구성된 그 설명서는 복잡하게 느껴졌다. 끝까지 다 읽고 절차를 감 잡은 다음에 진행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앞 부분을 잊어버리고.. 전반적인 느낌은 소독이나 뭘 만지면 안된다는게 많아서 “아 그러니까 샘플 오염을 방지하는게 제일 중요하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걸 나중에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다른 한손으로 페이지를 넘기다가는 실수로 피를 묻히고 샘플이 오염되고 그럴 수 있으니까, 아예 전체 설명을 다 한눈에 보면서 진행 할 수 있게 설명서 종이를 다 뜯어서 책상 위에 순서대로 배치했다. 1번 페이지 뒷쪽에 2번이 있어서 다 놓을수는 없지만, 4개 언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영어, 스페인어, 따갈로어, 중국어) 1번은 영어, 2번은 스페인어, 그리고 3번은 다시 영어로 교차배치하면 다 배치할 수 있다.
설명서를 다시 훑어보면서 어려워하다가 그냥 1번 페이지에 나온대로 봉지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다 꺼냈다. 샘플오염 방지가 중요한데 내용물을 다 꺼내도 괜찮은 걸까? 그러다가 뭔가 실수로 만지면?
그리고 내용물 중에 채혈카드가 있는데, 거기에 나이, 성별, 인종, 채혈날짜를 쓰는 란이 있는 걸 보고는 드디어 하기 쉬운게 등장해서 반가워하면서 작성했다. 어휴 이건 쉽네… 그런데 그 후 설명서에서 4번 절차에 “채혈카드에 있는 동그라미는 만지면 안됩니다”라고 적혀있는 걸 발견했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걸 처음에 내용물 꺼낼 때 안 얘기해주고? 볼펜으로 쓰면서 만진거 같은데? 최대한 긍정적으로 돌이켜보자면 어디보자 아마 동그라미 5개 중 5번 동그라미, 또는 4번, 5번 동그라미만 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나머지 동그라미들은 괜찮을지도?
손가락을 소독한 후 드디어 손가락을 찌르고 피를 카드에 떨어트릴 순서가 되었다. 한가지 이상한점은 지시사항에는 “새끼손가락을 찌르시오” 라고 적혀있지만 그림에는 약지(4번 손가락)를 찌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손가락을 찌르기 위해 바늘이 들어있는 플라스틱 기구가 제공되는데, 손가락 위에 올리고 잘 누르라고 한다. 살살 누르니 반응이 없다가 누르는 힘이 어느 지점을 넘는 순간 스프링 메카니즘이 발동하며 바늘이 찰칵 하고 나와서 손가락을 찌르는 구조였다. 모르고 눌렀다가 깜짝 놀랐다. 하여튼 이제 피가 나오고 있으니, 잘 조준해서.. 첫번째 방울은 지시대로 오염방지를 위해 버리고 두번째 방울을 떨어트리니 1번 동그라미에서 살짝 비껴나가 떨어졌다. 나쁘지 않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두번째 방울 이후 피가 잘 안 나오는 것이었다. 지시사항대로 손가락을 잘 눌러서 피가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런데 피가 방울방울 샘솟는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쌓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피가 비교적 끈적끈적한 느낌이고 방울이 꽤 커보이는데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거다. 그렇다고 종이에 갖다대면 안된다. 지시사항에 따르면 피방울이 저절로 동그라미 위에 떨어지도록 해야한다.
좀 더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가락은 엉거주춤 카드 위의 대략적인 위치에 둔채로 제자리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더 빨리 뛰도록 하면 이놈의 피도 안 나오고는 못배기겠지! 조금 뛴 후 다시 손가락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조금씩 눌러주기를 반복했다. 이게 효과가 있기는 했는데, 문제는 피가 모이다가 언젠가는 떨어질텐데, 그 떨어지는 시점이 언제일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모은 피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 무작정 달릴수도 없고, 적당히 달리다가 눈치보면서 손가락을 만져주고, 그리고 다시 달리고..
또 하나 걱정되는점은 손가락을 만져주다가 피가 흐르는 지점을 잘못 만질 경우 샘플오염이 일어날수도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내 새끼손가락은 그렇게 긴게 아니라서 뭘 만져줄 길이도 별로 없다. 그리고 이쯤되자 손가락 끝에 피가 꽤 모여있는데 피에 가려서 바늘을 찌른 위치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나는 점도 한몫했다.
엉망으로 조준된 방울을 두 번 더 떨어트리고 나서 (사진에 보이는 세번째 방울은 방울을 떨구기 위해 손가락을 흔들다가 엉뚱한 곳으로 떨어졌다) 피도 안 나오는데 그냥 종이를 만지기로 했다. 어차피 오염된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5번 동그라미에 갖다댔다. 종이에 갖다대니 뭐가 문제였는지 밝혀졌다. 이미 피가 응고된 상태였던 것이었다.
다시 손을 씻고 소독하고 이번에는 왼손 약지를 찌르기로 했다. (왼손잡이라서 처음에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찔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가락의 중간을 찌르는게 아니라 아주 끄트머리를 찌르기로 했다. 첫 손가락에서는 중간을 찔렀더니 핏방울이 찌른 지점에서 고이는게 아니라 (당연히) 손가락의 끄트머리까지 흘러간 후 거기서 고이던데, 피부를 타고 흘러가는 동안 안 그래도 많이 나오지도 않은 피의 양이 표면장력 때문에 더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시 한바탕 뛴 다음 손가락을 찔렀다. 첫 손가락을 찌를 때 바늘이 갑자기 튀어나오는게 기억나서 바늘기구를 누르는게 무서웠다. 그냥 바늘로 천천히 찌르면 좋을텐데, 왜 이렇게 툭 튀어나오도록 디자인한걸까? 아마 바늘이 찌르기 전까지는 다른 물건에 닿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어서 그런거 였겠지만 하여튼 되게 무서움.
첫 손가락의 경험을 살려서 피가 더 나오게 하는것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피가 나오게 하는 이 과정 내내 핏방울이 엉뚱한 곳에 떨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손을 엉거주춤 든 채로 제자리 뛰기; 손가락 주물러주기; 방울이 떨어지도록 손가락 흔들기. 한 열번 정도 떨어트려 겨우 동그라미 두개를 완전히 채운 후 질려서 그만하기로 하고 (동그라미를 최소 두개 채우도록 되어있음) 말려서 상자에 넣어 보냈다.
상자에 넣기 전에 웹사이트에 가서 피험자 고유번호를 입력하니 꽤 긴 설문지가 나왔다. 아 이래서 웹사이트로 가라고 했구나.. 질문 중 하나는 “백신 접종을 받았습니까?” 인걸 보니 접종자의 자료도 뭔가 분석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하다. 그리고 설문지를 다 답하면 종이설명서와 유사한 내용이 나오면서 바늘 찌르는 방법, 손가락 주물러 주는 방법 등이 동영상으로 나오는 부분을 보여준다. 뭐 이미 다 끝난거지만 동영상으로 접할 수 있는 과정보다 특별한 노하우 같은 건 없어서 딱히 미리 봐도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근데 전체적인 진행 구도를 감 잡기에는 도움이 되었을지도? 박스에 피 뽑기 전에 웹사이트에 가보라고 적혀있지는 않아서 이렇게 된거지만. (따져보자면 박스에 “시작하기 위해서는 웹사이트를 방문하세요” 라고 적혀있기는 한데, 나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를 놓쳤다.)
그런데 채혈 과정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사람들의 혈액샘플이 오염된게 너무 많을 것 같기는 하다. 아마 연구자들이 이 정도는 예상하고 준비를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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