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 그러길래 피 억압자에게 목소리를 주면 안된다니깐

    좆선일보: 쑥대밭된 광주 부정 수능 취재기 를 보고..

    지종익 기자 양반, 참으로 꼴이 좋소이다. 광주에 가서 좆선일보 명함을 다고 고압적으로 취재를 해보려다가 곳곳에서 까버림을 당하니 참으로 기분이 좆선같지요?

    신근대주의자들이 경고를 해온지 이미 십오년이 지났건만 종익이는 주류적 담론의 기본 원칙을 망각해버렸소. 무릇 사람을 억압하려면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면 안된다 말이오!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 그것도 기자를 까는 목소리를 그대로 실어서 “잘 못한 학생이 감히 좆선 기자를 까니 황당하다”라고 우는 소리를 내니 망해도 참 폭삭 망했소.

    “누구야? 기자야? 짜증나. 말 하지 마. 저 개새끼들한테 말해서 뭐하게? 쟤들 말해줘 봤자 왜곡해서 쓰니까 이야기하지 마.” [기사 中]

    얼마나 열받았으면 이제는 아예 ㄱ 학생 또는 ㅇ 학생도 아니고 그냥 기사 중간에 찔러 넣었을까. 이해가 간다 해. “가담한 학생의 친구”로 배경은 참 잘 끼워 맞추려고 노랙해주셨소. 저 막말을 기자 앞에서 큰소리로 해준 학생의 대 매체 의식에 경의를. 종익이는 지금이라도 존 휘스케의 [대중문화] 2장: 상품 및 문화를 찾아보시오.

    “청소년은 종합 쇼핑몰에서 최상의 게릴라이다. … 돈은 없으나 시간은 남아도는 상황에서 그들은 상품만 빼놓고 공간과 시각결과물을 소비한다. 그들은 쇼핑몰이라는 공간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예를 들어 진열대 주위로 몰려들어 고객이 상품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음료수 캔에 맥주를 넣어 마시면서 주인의 신경을 건드려 보안요원을 부르게 만든다.” (휘스케, 1989: 38)

    기자로서 무시당하는 것에 열받아서 한 건 저질러 보려면 학생들의 반주류적인 말은 능력껏 왜곡해서 당신이 좋게 보이게 해야 제대로 여론 조작이 되지, 이렇게 치부를 드러내서야 냉소밖에 더 얻겠소? 흐흐. 당신은 지금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거요. 뭐냐 하니, 당신의 글 속에 이들이 말할 공간을 좆만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인용을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해서 이들이 하는 말의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의가 당신의 쪽팔림 및 노여움을 능가해 버린 것이요. 왠만하면 공간을 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요.

    왜 종익이 머리 속에서 얘내들을 인용해야 하는 압박감을 느꼈는지 안 봐도 삼천리구만.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기자에요?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든가!” [기사 中]

    그러게 말이요. 정작 당사자는 접근도 못하고 뻘뻘거렸소? 아무래도 가족의 눈총이 따가우니 뒷담 넘어 친구를 추궁했구만.

    이 글 올려준 스타라이트 님께도 참으로 감사한 말씀을 전해야 겠구만. 님의 공로가 아니면 어찌 내가 그 많은 매체의 겹겹이 해석성 기사를 뚫고 나온 이 고딩들의 직접인용을 들었겠소. 오마이도 그렇게 직선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았으리요

    후후, 개운해라. 광주 고등학생들 힘내시오.

    그리고 종익이, 조까시오.

    사진 출처: http://maddox.xmission.com (본 글과 상관 없음)
    Image source: http://maddox.xmission.com (image is unrelated to the article)

    2004년 12월 4일

    김용호

  • [번역]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번역 작업사이트: w.yokim.net/White_Nationalism_and_the_Multiracial_Left

    세상 크게 보기: 마이클 무어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한국어 번역]
    케년 훼로우, 길자 김

    Connecting the Dots: Michael Moore
    White Nationalism & the Multiracial Left [korean translation]
    by Kenyon Farrow and Kil Ja Kim
    nathanielturner.com/connectingthedots.htm

    2004년 6월 9일

    영상작가 및 평론가 마이클 무어가 [미국] 좌[익]의 깡패로 변하는 것에는 겨우 십년 밖에 걸리질 않았다. 혹자는 뉴욕타임즈지의 베스트셀러를 두권이나 출판하며 2003년 총기산업을 다뤄서 오스카 다큐 대상을 받고 금년 깐느 축제에서 부씨를 비판하는 화씨 9-11로 최고상을 받은 무어를 좌익에 포함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마이클이 “진보”, 또는 “급진”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디즈니사 CEO 마이클 아이스너가 화씨 9-11을 막아버린 이후 영화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다큐를 배포하겠다고 나선 데 있다. 결국 그가 주류 미디어계에 갈채를 받으며 (깐느에선 장장 이십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낌을 받는 깡패가 된 것은 그를 바라보는, 주류 정치담론에서 배제된 수많은 좌파인들에게서 홀대받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무어를 좌파정치와 연결해서 보는 것은 “좌익”이 의미하는 바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좌익 내부의 향방이 무어의 방법에 복선으로 깔려있는 상태를 문제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마이클 무어는 백인 국가주의자일뿐 이다. 그의 백인국가주의적 접근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생각하는 이들과 제도화된 좌익을 연결시키는 점이다.

    혹자는 “급격한” 단체들에게 허용되는 백인 국가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헷갈려하실수도 있겠다. 우리가 보기에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은 미국내 사회관계에서 이미 정상적인 것으로 전략한지 오래다. 백인들의 역사와 경험에 근거한 국가형성 계획이 우리가 말하는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이기 때문이지. 백인국가주의는 그저 백인중심의 사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백인 국가의 (이는 정부가 합의한 변경을 따르거나 사회상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일수도 있겠다) 지속 및 확장을 백인의 근심, 걱정, 공포 및 욕심등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백인국가주의 담론은 백인성과 미국시민사회,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시민권의 인종 계획화 및 성적계획화를 지나치곤 만다. 백인 국가주의적 접근의 첫 시발점은 “백인이 자신의 국가를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이다. 고로 백인국가주의 계획의 시선은 정부세력, 민중으로부터 발생하는 “반항성” 또는 세계 경제의 흐름중 어떤 면이 백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느냐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무어의 작품을 잘 살펴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는 주제가 백인 시민의 잃어버린 권리와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란 것을 알수 있다. 미시간주 플린트시의 자동차산업 대량해고나 무기산업, 2000년 대선 무효나 미국애국법 [USA PATRIOT Act]를 다루며 이들 문제가 유색인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무어는 이러한 문제가 문제 자체가 되는 이유를 백인 시민/노동자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멍청한 백인”의 개론중 무어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미국인들은 다 누군가가 우리의 밤샘 잔치의 전원을 뽑았다는 것을 안다. 미국의 세기는 다 갔다. 21세기 악몽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러한 “미국의 세기”가 끝났음으로 제시되는 이유들로 선거부정을 저지른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것, 일자리들이 [주로 전문직] 축소 및 해외수출되고 있다는 점, 주식 시장이 호황이 아니라는 점과 집 주인들이 융자금을 갚기가 어렵다는 점을 든다.

    이러한 백인 중산층류의 불평불만은 “친구야, 내 나라 어디로 가뿌렸나?” 에서도 확연하다. 제목만 보아도 백인 국가주의 이념에 핵심 역할을 하는 소유 및 권익 정서를 표현하지 않나? 9-11과 이라크 전쟁에 촛점을 두는 “친구야…”는 정경유착과 미국 시민/노동자의 낮아지는 임금/구매력에 대한 비판이자 국가의 “개혁 가능성” 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다.

    중산층이 집 구할때에 융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현실에 대해 불평하거나 2004년 대선에서 부시를 넘어뜨릴만한 이들을 선거장으로 끌어내는 일에 있어서 무어는 (노예가 아닌) 시민의 [여기서 “비노예 시민”은 백인을 가리킴] 공화국을 개혁할 능력에 대해 긍정적이다. 하나의 주장을 끝 매듭지으며 무어가 하는 소리를 보시라 “어떤 나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 그런 나라는 또 없습니다…. 아주, 아주, 자유개방적이고, 해방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는 이 나라… 이 빨갱이 낙원의 이름은 다름이 아닌 미대륙합중국 이라지요!” 무어의 이러한 긍정성은 자신의 인생 자체가 미국 비백인의 경험과는 다른 백인의 인식에서 근원하는 것 자체에서 백인중심적이지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백인우월주의적인 정부와 백인 시민성에 대한 베팅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무어는 결코 “미국 국가의 계획” [the American project] 상 “시민” 또는 “국가” 같은 개념들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어떻게 건축되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 발드윈 [James Baldwin]이 “백인공화국”으로 축약한 그것에 상기 개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지 프랑크 리흐 [Frank Rich]의 [그 또한 백인좌파엘리트이지만] 말을 빌리자면 무어는 “everyman” [소시민] 이다. (이 또한 인종차별주의 및 성차별주의적인 용어이며 백인 남성을 위해 거의 집중적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실제로 소시민 이든 아니든 그가 백인시민의 국가정부내의 접근권 및 포함됨을 급진적인 변화에 우선함은 확실하다.

    무어가 국가정부와 포함됨에 집착하는 것은 그가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미제국의 지배정책 등등의 미국계획을 실제로 의문시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무어에게 있어서 “실상의”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은 기업 견제, 공권력과 이를 지지하는 특정이권그룹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유한 백인남성 (또는 “멍청한 백인 남성”) – GM사의 회장 로저 B. 스미스, 록히드 마틴사의 관료 에반 막컬룸, NRA 활동가 차를턴 헤스턴, G.W 부시와 딕 체니 – 및 그들의 욕심에 피해를 보는 백인 중산 및 노동자 계급에 촛점을 맞출 뿐이다. 무어는 자본부의를 그 자체로서 억압적인, 특히 비백인 인구에게 그러한 체제로서 비판하지 않고 그 대신 부유한 백인남성들이 그렇게 욕심쟁이이지 않기만 하다면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분석한다. “멍청한 백인 남성” 논지의 전제는 결국 자신의 동포인 중산층 및 노동계급 백인들과 소유를 공유하며 그들 또한 미국 계획의 산물을 누리도록 해야 하는다는 것인 것이다.

    무어식의 부패한 개인들을 문제화 하며 동시에 부패한 제도를 (기업 또는 정부 등의 구조에 의해서 현실화되는) 문제화 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백지수표를 내주는 것과 다름없을뿐만아니라 내부 차이에도 불과하고 백인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협력해서 백인우월주의와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을 통해 모든 형태의 억압을 지탱하는 현상을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거한 그들의 백인우월주의 및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은 동시에 그들의 반흑인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에 대한 투자를 나타낸다.

    1787년 헌법 모임의 토론에 나타났듯이 미국에서의 시민권이란 개념은 원래부터 노예화된 인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시민” 또는 “자유로운” 사람은 특정인종과 성의 테투리 내부에서 시민사회에 참여할수 있었다. 이 구조는 반개념 [antithesis]인 노예의 개념에서도 적용된다. 여러 사회 그룹이 노예 제도 또는 토지에 포함된 하인 생활에 얽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만이 평생 노예로, 다시 말하자?자유와 공(共)화국의 [re/public] 참여에 합당하지 않는 인종으로 이해되었다. 합법적 노예제도 시대 동안도 몇몇 안되는 “자유로운” 흑인들은 끊임없이 노예로 복귀시키겠다는 협박 및 폭력 그리고 실상 및 실법 차별아래 있었다.

    오늘날 미국이란 계획이 여러 인구들을 섭렵하면서 백인 공(共)화국을 다인종 공화국으로 만든 이후에도 흑인성은 시민성 또는 “흡수될 만한것”의 경계선 바깥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하여 시민성의 사유의 주체의 반개념으로 작동한다. 비흑인 유색인종의 시민권이 원래 희미하며 결코 백인시민권의 위치에 필적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도 흑인성은 반-시민으로 작용하여 다인종 미국계획에 뚜렷한 경계선을 제시한다.

    무어식대로 시민권과 민주주의에 투자를 하자면 죠이 제임스가 [Joy James] 지적한 것 처럼 미국 사회만큼 철저히 인종세분화된 사회에서 “범죄성, 반사회성, 부도덕성 그리고 부패가 흑인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현상”을 문제화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무어가 이런 방식의 분석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백인 군인의 가족원을 인터뷰 할 때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왜 그들이 총에 집착하는 지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그들이 왜 자신을 “범죄자” 또는 “침입자”들을 상대로 보호해야 한다며 무장해야 하는 지 설명할때 무어는 그 “범죄자”는 분위기상 흑인을 가리치는 것임을 문제화 하지 않는다.

    이렇게 잘 조직된 반정부 군단체들이 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왜 젊은 표범당 [Black Panther Party]나 미 원주민 운동 [American Indian Movement (AIM)] 같은, 호전적인 백인정부와 시민사회를 향해 무력해방시도를 주도한 단체들은 FBI 첩보원, COINTELPRO 등의, 흑인 및 미원주민 공동체를 분쇄하려는 수많은 조직들에 의해서 구조적 및 폭력적으로 해체당하면서도 무어는 그러한 파괴를 주도한 정부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비판을 가하는가?

    다시 설명해보자. 무어가 자신을 포함시키는, 그리고 좋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백인시민대중은 동시에 흑인 및 원주민을 억누르는 백인국가정부의 보호를 받는다. 억압의 형태는 대게 급진주의를 제거하거나, 공공교육예산을 감축하거나 게토와 가난한 농지에 여러 종류의 구조조정 정책을 감행하거나 가난 및 중독을 범죄화 하거나 (그러면서도 마약 거래는 조장하고!), 공공 주거지역 및 원주민 구역 그리고 경찰력을 통한 억압 및 대규모 감옥화등을 지닌다.

    우리들이 무어가 반흑인 계획을 추진한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불공평하다고 할지도 모르겠군. 그의 저서와 영화속에서 무어는 노예 제도, 인종검문 및 감옥화등을 다루지 않던가? 라고. 물론 그러하긴 하지만, 무어는 그러한 비판이 그의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흐트리지 않는 수위에서만 문제제기를 할 뿐이며 오히려 그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인종차별적인]상황이 전제되어야만 대중이 지지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백인 시민/노동자/반기업 주체가 존재할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종종 무어는 이러한 패러다임에 들어맞는 비백인들에게 그의 지지를 보내는데 바로 이러한 “너그러움”이 있을 수 있다는 상황 자체가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의 협력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백인국가주의와 다인종 공/화국에 대한 지지와 공존 하는 예시로 “친구야…” 에서 9-11후 중동 및 남아시아 발 이민남성의 이유 없는 수색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국가 보안의 비호 아래 비백인을 도매로 잡아들이는 것은 백인우월주위라는 점에 대해 동의 할수는 있지만 우리는 무어가 이민자들을 변호하는 방식을 문제화 한다: “많은 사람들을, 그들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 할 만한 이유도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비-미국적이다 [un-american]”. [번역 주: 비미국적이라는 단어는 9-11 후 이민자들과 외국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을 국내 정책 담론에서 소외시키기 위한 부시의 매체 전략이었음] 이 선언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람을 특정 이유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매우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투옥율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것을 생각하자면 말이지.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무어가 비백인 이민자들의 투옥 및 추방을 문제화 할 때 그 논리에 깔려있는 전제는 “범죄적” 인체는 “위험하고” 그로서 그들은 투옥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노예 제도가 끝난 후 미국의 흑인들이 다른 인종 그룹과 비교 할 때 압도적인 비율로 투옥된 점, 그리고 “자유 서방”에서 흑인성은 경찰이 훈련을 받을 때 범죄자의 기본 형태로서 제시된 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무어가 이민자들의 불공정한 투옥에 대한 가하는 비판은 이들 이민자들이 “진짜 범죄자” (말하자면 흑인) 가 아니면서도 범죄자인 마냥 다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읽을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흑인의 위치성을 사회 구조의 필요조건으로 읽는 대신 이를 가져와 결백에 대한 이야기를 풀려 쓰는 것이다.

    무어와 그가 지지하는 다인종 좌익 사이에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이들은 공유하는 점 또한 지니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멍청한 백인 남성”을 비판하는 진보 운동은 흑인성에 대한 공포에서 그 원천을 찾는 다고 할수 있으리라. 쉽게 말하자면 흑인에 대해 관심은 없고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수 있다.

    미국의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자. 이는 다인종적인 노동조합, 이민 권익, 반 노동착취 [anti-sweatshop] 반기업 그리고 반 감옥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크 윌더슨은 [Frank Wilderson] “반 세계화 운동의 민주적 포퓰리즘은 이념 및 물질적으로 반흑인성으로 묶여있는데 이 반흑인성은 말하지 않고서도 이해되는, 그러면서도 필수적이며 광범위한 성질을 지닌다.. 반세계화 운동이 흑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이들이 난민일 경우 일 뿐인데 이 경우 그들은 다른 이의 사업에 무단침입한 것 뿐이다”라고 적절하게 기술한다.

    윌더슨에 의하면 반 세계화 운동에게 “가능성의 전제”로서 흑인의 죽음은 잭슨 민주주의에 [Jacksonian]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 이는 19세기의 전통으로서 “소시민” 백인 남성에게 백인 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시민사회와 시민 권리를 더 넓히려는 목적을 지녔다. 이 시도는 미국긍정이면서 반지배세력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반흑인성을 띄었는데, “소시민”의 권리창출과 자기 교육은 노예 제도 또는 노예화 된 비합리적인 대상의 존재 하에서만 형태를 갖출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잭슨 민주주의파 처럼 무어 또한 사회가 흑인의 위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에 의지해 지배 세력가 투쟁하는 것 처럼 보이는 “소시민”의 권리를 지지할 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허나 윌더슨이 지적하듯이 “오늘날의 반 세계화 운동과는 달리 잭슨파는 내놓고 그들의 백인 우월주의를 천명하였다.” 흑인의 죽음은 사회 기회와 사회 움직임의 가능성에 구체적 형태를 주는데 오늘날 다인종 정치의 세기에, 시민권 및 민주주의에 집중하는 백인은 흑인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멍청한 백인 남성들” 또는 “권력을 잡은 백인들” (이런 표현은 사실 필요하지 않는데도) 을 조롱하고 못박으면서 백인국가주의로 낙인찍히는 것을 면하고 동시에 소수의 유색인들에 (무어의 경우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 대한 지지를 표현할 수 있다.

    무어와 수 많은 좌익 운동은 공유하는 점이 크다. 오늘날 공(共)화국의 다인종 본질을 고려할 때 살아있는 제도화된 진보운동 중 명백하게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그러나 미국 계획이 흑인의 억압 및 죽음의 구조화 인것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진보 운동은 “멍청한 백인 남성”을 후리는 것에 있어서 무어와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

    오늘날의 다인종 진보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는 아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한편으로 미국 시민사회를 접근하기 위한 시도이며 반면으로는 흑인성의 저지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두렴움을 표현한다. 이런 성향은 대중의 시민권 접근성 및 시민/개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을 통해 확인할수 있다. 모든 좌익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무어의 계획과, 또한 19세기 잭슨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단순히 말해 반흑인 인종차별이다. 윌더슨은 이 문제에 대해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 “모든 반공적 정치 흐름이 백인 긍정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항상 반 흑인주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간단하게 말해, 다인종이던 아니던 어떠한 정치적 성향의 운동이라도 근본적으로는 미국 계획상의 흑인 위치성을 문제화 함으로서 급진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대신 그 흑인 위치성에 의지해 정치세력화를 꽤하며 시민권, 민주주의 그리고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운동가들에게 놓인 과제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어떤 방법으로 무어 성향의 반흑인 인종차별 및 성차별 그리고 백인 국가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을 피하는 가 하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흑인의 생물 및 사회상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고 시급한 이슈를 위한 지지/자금을 구할 것인가? 백인 국가주의 속성상, 비흑인들은 어떻게 하면 흑인 범죄수의 상(狀)을 자신의 안티테제로 제시하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며 결백을 증명할 것인가? 흑인의 사회적 위치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를 흔드는 과정으로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문제화 할수 있는가? 그러한 시도는 어떠한 형태 또는 담론을 지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국가주의/다인종 정치의 시대에 “좌익”으로 이해되어지고 씌여지는/출판되는/소비되고 제도화되는 정치 언어, 정체성, 운동에 대한 신념과 염원의 재 구조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과제일수 가 없다. 그러한 재구조화를 위해서는 이미 정착된 담론과 제도화된, 진보적으로, 급진 또는 혁명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정치 형태를 문제화해야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은 마이클 무어등의 정치계획을 포함하는 제도화된 좌익 담론을 비판적으로 상대하며 때가 되면 그 테투리를 넘어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 * *

    케년 훼로우 [Kenyon Farrow]는 뉴 올리언스 [New Orleans]에서 활동하는 필자, 운동가 및 연출가이며 길자 김 [Kil Ja Kim]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활동하는 연구자, 교육가 및 운동가입니다.

    원 저자 연락처:
    Kenyon Farrow kenyonfarrow@hotmail.com
    Kil Ja Kim kiljakim2003@yahoo.com

  • 겨울 방학 되면 쓰고 싶은 글…

    겨울 방학이 2주면 다가오면서도 영원처럼 느껴지다니…

    번역하고픈 글:
    제니퍼 [로페즈]의 엉덩이
    Frances Negrón-Muntaner. Jennifer’s butt. Aztlan 22 (1997): 181-194

    누구의 스페인어이고 누구의 언어이며 누구의 권력인가? 차별된 이중언어에 대한 민족지적 질문
    Frances Aparicio, “Whose Spanish, Whose Language, Whose Power?: An Ethnographic Inquiry into Differential Bilingualism,” Indiana Journal of Hispanic Literatures

    엘비스는 그런 일을 처리하곤 있어: 치카노 대중 음악의 국제/내 영향 <– 상기 사진을 보시라
    Michelle Habell-Pallan. El Vez is "taking care of business": the inter/national appeal of chicano popular music. Cultural Studies 13(2) 1999, 195-210

    1921년 인디언 미인대회와 멕시코 국가문화의 민족화
    Rick A. López. “The India Bonita Contest of 1921 and the Ethnicization of Mexican National Culture”, Hispanic American Historical Review, no. 82, vol. 2 (2002): 291-328

    닥치게 하는 힘: 후기아파르타이드 남아공의 사회 지형
    Kate Crehan. Silencing Power: Mapping the Social Terrain in Post-Apartheid South Africa In Contested Terrains and Constructed Territories: Contemporary Africa in Focus. (2002) pp. 173-193.

    가나 관광사업
    Edward M. Bruner. (1996)Tourism in Ghana: The Representation of Slavery and the Return of the Black Diaspora. American Anthropologist 98(2): 290-304
    해석 같은 것 올리고 싶음..

    검은 소음: 현대 미국의 랩 음악과 흑인 문화
    Tricia Rose. Black Noise: Rap Music and Black Culture in Contemporary America (1994)
    쓰고 싶은 주제: 전략적 정체성, 언어 힘의 관계, 관계의 지리, 학생 운동 내의 인종역학, 기독교와 LGBT, 인류학 내부의 대 포모학파 암투, 이중언어와 젠더, 여성본질주의와 메일링 리스트, DW

    트랙백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
    http://www.mediamob.co.kr/zodiac/23822.html
    http://www.mediamob.co.kr/zodiac/post/tb.asp?PKId=23822

    수 이야기로 시작해 봅니다
    http://www.mediamob.co.kr/yoomyungah/22340.html
    http://www.mediamob.co.kr/yoomyungah/post/tb.asp?PKId=22340

    작게 꺼끌대는 뱃속의 알갱이
    http://www.mediamob.co.kr/cheezelol/9560.html
    http://www.mediamob.co.kr/cheezelol/post/tb.asp?PKId=9560

    공부
    http://www.mediamob.co.kr/cheezelol/19386.html
    http://www.mediamob.co.kr/cheezelol/post/tb.asp?PKId=19386

    이를테면 측정의 문제
    http://www.mediamob.co.kr/rockdipl/13419.html
    http://www.mediamob.co.kr/rockdipl/post/tb.asp?PKId=13419

    민족, 민족주의, 그리고 약자들의 이데올로기
    http://www.mediamob.co.kr/vedder/7289.html
    http://www.mediamob.co.kr/vedder/post/tb.asp?PKId=7289

    기업으로 간 인류학자 1
    http://blog.naver.com/cliffrunner/40007310550
    http://blog.naver.com/tb/cliffrunner/40007310550

    기업으로간 인류학자 2
    http://blog.naver.com/cliffrunner/40007310987
    http://blog.naver.com/tb/cliffrunner/40007310987

    기업으로 간 인류학자 3
    http://blog.naver.com/cliffrunner/40007311232
    http://blog.naver.com/tb/cliffrunner/40007311232

    우상화된 할리 데이비슨
    http://www.mediamob.co.kr/pickyouup/21611.html
    http://www.mediamob.co.kr/pickyouup/post/tb.asp?PKId=21611

    미국판 색깔논쟁 (?)
    http://www.mediamob.co.kr/dechang/27535.html
    http://www.mediamob.co.kr/dechang/post/tb.asp?PKId=27535

    사연의 정치, 서사의 복원
    http://www.mediamob.co.kr/vedder/15408.html
    http://www.mediamob.co.kr/vedder/post/tb.asp?PKId=15408

    기독교인과 수구성
    http://www.mediamob.co.kr/vedder/17885.html
    http://www.mediamob.co.kr/vedder/post/tb.asp?PKId=17885

    블로그 vs. 홈페이지
    http://www.mediamob.co.kr/vedder/7302.html
    http://www.mediamob.co.kr/vedder/post/tb.asp?PKId=7302

    개인주의 vs. 이기주의
    http://www.mediamob.co.kr/vedder/13723.html
    http://www.mediamob.co.kr/vedder/post/tb.asp?PKId=13723

    언제나 Insider같지만 늘 Outsider인…
    http://www.mediamob.co.kr/sirius7/27368.html
    http://www.mediamob.co.kr/sirius7/post/tb.asp?PKId=27368

  • 자위로 생각해보는 언어와 사고의 연관성

    1.

    • 넌 생각 할 때는, 무슨 언어를 쓰는 데?
    • 걍 생각 하는데…?

    사고의 과정은 특정 언어 표현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는 다고 봅니다. 생각은 생각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할 경우에만 특정 언어를 사용, 그 때 그때 어휘와 문법의 적절한 조합을 사용, “표현” 하는 것이라는 것이라죠. 그런데 이걸 공감하지 못하는 아해들이 많더라구요. 혼잣말은 어떻게 하느냐.. 원래 생각이라는 것이 언어적이지 않더냐.. 등등. 그런데 이건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견해차이 같아서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았죠. 난 원래 생각을 말로 하질 않지만 아주 피곤하거나 힘들면 생각을 입으로 소리내서 하게 되거나 머릿속으로라도 일부러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고. 숙제를 해야 겠다라는 것이 “숙제를 해야 겠다” 라는 기표인가, 아니면 [숙제] 라는 물건의 해결을 봐야겠다는 [결심]과,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 등의 느낌의 결합 아니겠어요? 설마 [숙제]라는 단어 자체가 숙제의 뜻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겠죠. 특정 언어 환경이 아닌 이상 “하우스아우프가베”가 [숙제]가 될수가 없듯이. 그걸 생각 한 것이.. 십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이에 대한 입장이 많이 바뀌지 않았다면 존중해 줘야 되지 않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그것부터 물어보더군요).

    생각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니 말도 안된다, 와 반대의견이 팽팽하게 몇 분 맞섬. 아무래도 입장이 좁혀지질 않아서 연관이 있는 주제를 하나 빼어들었슴다.

    • 야 너는 자위 할 때.. 특정 여자를 염두에 두고 자위 하냐? 난 그런 건 상관 없거든?

    특정인을 생각하며 자위한다네요. 흠.. 자위는 섹스를 하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 보충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몸이 자극을 원하니까 되는 되로 자극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일까. 난 느낌을 받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만인데.. 얘네들은 더 구체적인 것을 필요로 하나보다. 웃긴 것은, 남성이 셋인데도 다들 동의했다는 것.. 여자 없이 어떻게 흥분하냐.. 이상한 놈이다… 옆에 앉은 여성동지가 하는 소리가, “다른 문화권들은 성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고 읽어 본적이 있어! 그래서 다름은 존중해줘야 해!”. 윽, 동지여, 그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구체적 대상 없이 자위가 안 된다는 놈들은 상상력 부족으로 치부하기로 했음.

    2.

    고딩 때 파멜라 안데슨 없이 자위가 안 된다는 이야기 말고도 충격을 받았던 이야기는.. 아해들은 보통 손으로 자위했다는

    아 참, 그렇게 필수적인 정보는 제 때에 공유해서 남에게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게 해야지, 끼리 끼리만 희희덕 거리니 우째 알수가 있나? 다 같이 모여서 딸딸이 치는 것두 아니고. 어떻게 알게 되었나 하면, 아해 둘이서 얘기를 하다가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것이 더 좋냐, 손바닥 전체를 사용하냐”를 듣고는 감을 잡았다는.

    몽정이란 것은 참으로 불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빨기도 애매하고, 가족에게 알리기도 난처한 사회적으로 미리 정의 되지 않은 그 아dd함. 한 많은 사춘기에 필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그 날 밤은 몽정에 시달리곤 했는데 이를 해결 하는 방법이 자위로 진을 빼놓는 방법이었고 손 없이 성공을 하려니 밤새도록, 서너시간은 거뜬히 끊임없이 잠옷을 벗고 등을 흔들고 배게로 마찰을 시켰다는. 그런 중노동 후에 오는 느낌은 타의 추종을 불허. 상기 노하우를 듣고 손을 써보니 상대적으로 너무 빨라 허탈했다는

    고로, 근대 헤테로 남성의 성해방은 아직도 손으로 하는, 구체적 대상을 상상하는, 등의 별의별 주류적 사회합의된 성적 놀이의 한계를 한 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죠. 기왕 할거면 내맘대로 하자구

    저기 상반 사진에 나온 왼손을 너무 뚫어지게는 보지 말라는.

    이거 읽고 삘받았다면 왠만하면 짬지닷컴사장님의 상품을 사용해 주자는.. 자본주의도 아는 사람끼리끼리 (트랙백 참조)

  • 자전거 낙마기

    작년 여름에 살던 집 그리고 금년 1월경 누군가가 훔쳐간 자전거 1호. 이야기에 나오는 자전거는 현재 갖고 있는 3호. 흰 콘돔처럼 보이는 것은 비 내릴 경우 의자가 젖지 말라고 싸매놓은 비닐봉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제발 창고에 갖혀있지만은 마라.

    난 자전거를 타고는 어딘가에 부딛혀 날라가는 감각이 참 탁월하다. 그게 아니면 통뼈가 굵은지도 모른다. 아님, 피가나고 살이 찢겨나가도 무뚝뚝한 사회적으로 정의된 마초의 역할을 잘 연기한다던가. 어쨋든 중요한 점은 차에 부딛히고 펑크가 나서 또는 도로의 큰 구멍에 자전거가 엉켜서 {자전거를 부둥켜안고/자전거에서 튕겨저 나와} 바닥을 굴러도 정작 몸을 말짱하다는 말씀이다.

    금년 구월 초, 밤 열시경에 일하는 곳을 나와 열심히 자전거를 달리고 있었다. 여긴 자전거 인프라가 나름대로 좋다. 전용 도로도 있고 웬만한 곳은 다 연결되는 자전거선.. 거길 타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중인데 문제는 암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는 것이다. 내가 검은색 가방을 쓰는 것이 이럴 때 문제가 된다. 헤드라이트 같은 것도 없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자고 싶어서 페달을 밟다보니, 세상에, 갑자기 오른쪽에 주차해있는 차에서 문이 덜컹 열리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악 할 시간도 없이 오른쪽 손잡이가 차 문에 걸리고, 자전거는 거기서 손잡이를 축으로 공회전하고 난 나가떨어졌다.. 튕겨저서 보도에 한바닥 굴렀던 것 같다. 보통은 책가방에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랬더라면 박살 날 번 했다.

    이럴 경우 가장 걱정되는 것이 상대편이 내가 심하게 다친 줄 알고 호들갑을 떨까 이다. 바로 일어서서 “어.. 나 괜찮소.. 다친 곳 없고. 그 쪽은 괜찮나? 허허 내가 오래 살다 보니 공중도 날아다니고..” 운전하던 사람은 어떤 여자인데 다른 남자랑 같이 차를 나와서 괜찮냐교 방방 뜨고 있다. “우린 괜찮고.. 날아가서 쳐박혔는데 우째 괜찮다는 말이에욧!” “음 제가 원래 이런 일에 익숙해서.. 요령이 생겼나 보죠 근데 전 자전거 손잡이 가지고 그 쪽 손가랍을 찌그러뜨리지 않나 싶었는데” “아뇨 괜찮아요”. “그럼 전 괜찮으니까 이만 봅시다.. 안녕~”

    집에 와서 보니 헬멧의 플라스틱 포장이 깨져 있었다. 오늘은 좀 강도가 심했군.

    그 밖에.. 자갈길에서 주르륵 미끄러셔 종아리와 허벅지에 피를 철철 흘리며 계속 시내로 달려서 여행사에서 비행기표 하나 예약 했던 것.. 아무래도 불쌍해 보이면 더 싸게 살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효과 없었음.

    또는 수업에 늦어서 자전거를 내달리다 길의 표면이 엇갈리는 곳에 바퀴가 끼여서 넘어진 일. 자신이 하도 한심하여 그대로 누워있자니 사람들이 중상인줄 알고 우르르 몰려옴.

    개코님의 “이 생경한 느낌…” 보곤 트랙백 할만하지 않을까 싶어 몇 자 써봄.

  • 친구들 모르게 스토킹 한다는 것

    친구들 모르게 스토킹 한다는 것이 왜 이리도 힘들다냐..
    thefacebook.com 과 구글에 아는 지식을 동원해 (아직도 50개가 넘는 이멜이 남아있다) 애들을 찾아보아도 딱 한 사람으로 좁혀지는 일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