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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 Rachmaninoff. Escucha.

    원어 링크

    어느새 기다리고 있었다. 요동치는 연주회. 라흐마니노프.
    나지막하게 그리고 피에 범벅된 물들과 무너지는 지진들로 들으라.
    나지막하게 그리고 임박한 재앙에 도주하는 표범무리와 낮종일 잠 못이루며 들으라.
    사람들은 네가 영혼이 찢어진 채로 흘리는 눈물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막막한 바다와 하늘뿐이라; 오늘은 시선조차 없기 때문이다.
    두 개의 황혼 사이, 푸른 화염, 꽃이슬, 땀과 땔감의 흐름,
    공감되지 않은 움직임의 강 사이로 비는 오고.
    들으라. 강인한 바위, 금속적이며, 거인 치수의; 떨어지며
    구르며 시작도 끝도 없는 계단에서 텅텅 튕기는 것.
    구름 무리 (신성 눈물의 익명적 공범자)여, 들으라,
    불의 의식을 경축하라, 방앗간에서 떨어지는 물레,
    노래와 흐느끼는 힘으로 떨어진다는.
    유일한 사막, 남겨진 초원, 바람이 동맥을 자르며
    태풍이 몰래 무덤을 파는 그 곳의 희생 의식을 경축하라. 지하 강은
    뜀박질한다. 뱀 마냥 태울듯한 습도 부족을 휘저어 가며 다람쥐를
    위한 촉진제, 도마뱀 무리, 어두운 선인장이 수평선 없는 모래 언덕에
    흩어진다. 물레 밑으로는 강이 흐른다네.
    고문, 그리고 일시성 잿더미가 주야로 이어지고.
    라흐마니노프. 들으라.


    01.07.99

  • 즉홍적으로 미국 버스 이용기 트랙으로 탈바꿈..

    1. 당신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전철) 노선과 역은?

    21번은 계급/인종 선언이죠 ㅎㅎ. 21번 A/C, 84번, 그 밖에16번 7번 144번 등등.. 역은 당연히 일터와 기숙사. 그리고 시내. 전철은 노선이 하나 밖에 없슴다.

    2.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이용합니까?

    가끔 전철도 타니까.. 에스컬을 탑니다. 아무래도 늙어서

    3. 승강장에서 당신이 버스를 기다리는 위치는 어디 입니까?

    문이 하나 밖에 없음 –; 사족을 붙이자면 운전자들은 표시판을 약간 지나쳐서 멈추기 때문에 그 정도 위치에서 기다림

    4. 승강장은 아직 한산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습니다. 버스를 의자에 앉아 기다릴 수도 있고, 제일 앞쪽에 서서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몸이 힘들거나 아프지 않은 당신은 어떻게 기다리시나요?

    사람들이 모여 들지 않는 다면 난 절대, 섣불리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버스가 지나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지난 봄 노조 협상이 실패한 후 운전기사들은 시간을 악착같이 맞춰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더 받고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보이게 하며 있음. 사람이 많으면 대략 장땡 – 그들은 밖에서 눈보라 맞으며 기다리고 난 보일러도 구비된 대기실에서 책 몇 페이지 후다닥

    5. 버스를 타기 전 당신은 제발 앉아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나요?

    원래 많이 앉아서 갑니다. 무척 피곤한 경우, 제발 두 자리 다 비어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긴 합니더. 의자를 가로질러 앉아서 자기에 딱 좋죠. ^^

    6. 버스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때 당신의 시선은 주로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버스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 보면서.. 시간표와 시계의 시각을 대조해 본다. 왜 늦었는가에 대해 짐작해 본다. 또 늦을 것인가.. 운전사는 제발 도중에 내려서 오줌누러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다음… 버스 패스를 찾는다. -_-;;;

    7. 아무도 없는 버스입니다. 당신은 어느 자리에 앉는 것이 편안한가요?

    일찍 어두워지는 북부 특성상 아무리 많이 다녀본 길이라도 여기가 어딘지 감이 안 잡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되도록이면 앞줄에 앉는다. 운전사 사람이 좋아보이면 바로 옆에 앉아서 말을 붙여보기도 하구. 대게 첫줄은 졸다가 급정거시 코 깨질 가능성이 있으미 둘째 줄 또는 샛째 줄을 찾는다. 손잡이 기둥의 배열이 삐질 삐질 한 것을 감안해, 뒤로 고개를 젖혔을 경우 손잡이 기둥에 머리가 뉘일 자리를 찾는다.

    8. 자리가 있으나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만취해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주머니를 뒤져본다. 애인 사진이라도 있나? 야한 것이면 간직하고, 배꼽부터 위로만 나왔으면 깨워서 짐짓 떨어진 지갑을 돌려주는 듯 능청을 떤다. 깨면 자리를 확보한다.

    9. 이번에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역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주머니를 뒤져본다. 일부러 누더기 옷을 걸쳤나 의심부터 해본다.

    10. 앉아 있는 당신은 아무 것도 할 만한 게 없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사람들 수다 떠는 것을 경청한다. 여자들 수다 떠는 것 엿듣는 것은 재미있다… 특히 그 쪽에서 내가 못 알아들으리라 짐작하고 마구 얘기 보따리를 펴는 경우는 더더욱.

    11. 전철에서 할 무언가를 꼭 준비한다면 당신이 주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언가 읽을거리라면 어떤 종류의 읽을거리 입니까?

    버스는 많이 흔들림으로 책을 읽는데 지장이 있다. 일터에서 돌아갈 경우 신문을 준비해서 읽고, 갈 때는 자거나 나중에 쓸 페이퍼를 구상하는데 시간을 투자.

    12. 아쉽게도 자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앉아 있는 사람들 중 하나를 찜해서 웃으며 말을 건넨다. 잘만 버티고 있으면 나가면서 자리를 독점공급해준다.

    13. 떡을 이고 들어 온 할머니가 당신에게 다가와 (팔아달라고)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내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한국으로 돌아가시라고 정중히 말씀드린다. 내가 여행사 직원과 연줄이 없는 한 표 하나 사드릴 수도 없다.

    14. 아이가 도와달라는 내용이 적힌 종이를 능숙하게 돌립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나 자살하러 미시시피 강에 간다 라는 내용이 적힌 종이를 서툴게 내준다.

    15. 랩퍼들이 뒷좌석에서 앉아서 free-stylin’ 중이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이럴 때 영어가 젤 딸린다 –;

    16.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 놈 없다.

    18. 전날 밤이 잠이 부족해서 머리를 계속 긁는데 비듬이 떨어지는 것 같다. 뒷좌석의 눈총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당신의 대응은?

    뒤로 돌아보며 미안하다고 하고 씨익 웃어준다. 그런 후 머리를 살살 긁는다. 잠바 어께치에 떨어진 비듬을 손바닥으로 쓸어담아서 주머니에 넣는다.

    19. 옆자리에는 멋진 이성이 앉아 있는데 자리가 비좁아 자연스런 스킨쉽이 성사(?)되었습니다. 땀 흘리는 여름도 아니어서 불쾌하지 않고 피부든 옷이든 뽀송뽀송(?)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어디 가시냐고 물어본다.

    20. 옆자리에 앉은 멋진 이성이 졸면서 머리로 당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결국 편안하게 기대고 있습니다. 그가 결코 고의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머리를 제대로 세워 준다. 다시 내 방향으로 기대버린다면 옷/장갑등을 돌돌 말아서 베게를 해준다. (생머리로 남의 어깨에 기대면 높이의 영향으로 목에 무리가 많이 온다.)

    21.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이성이 별로 멋지지가 않습니다. 혹은 동성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멋지지 않은 사람의 친구들이 멋질 가능성은 높다. 전화번호를 물어본다. 잘 만 걸리면 파티에라도 초대 될수 있다. 그 때 가서 본전 건진다.

    22. (남성) 양쪽으로 자리가 있는데 한쪽에는 미인이 짧은 치마를 입고 앉아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어느 쪽에 앉겠습니까?

    옆에 가서 앉는다. 엉덩이를 밀착한다. 버스가 흔들리는 것을 포착, 치마를 문질러서 서서히 올라가게 한다. 반대쪽 남성의 눈빛을 자세히 관찰한다.

    23. (여성) 양쪽으로 자리가 있는데 한쪽에는 꽃미남이 얌전하게 앉아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어느 쪽에 앉겠습니까?

    옆에 가서 앉는다. 근데, 얘는 치마 안 입나? 반바지라도 입겠지? 엉덩이를 밀착한다. 지퍼 부분 돌기 형상의 변화를 예의 주시한다. 변화가 있으면 전화번호를 얻는다.

    24. 서 있는 사람은 없는데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아, 노약자석이 비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하십니까?

    노약자석에 앉는다.

    25. 막차를 탄 당신 앞에 술에 취해 정열적으로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이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따라서 같이 내린다.
    동향을 봐서 한 쪽을 슬쩍 한다.
    또는 길가는 행인과 맞바꾸치기 한다.

    26. 당신은 정말 피곤해서 잠들었는데 갑자기 어떤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이 싸가지가 없다는 둥 욕을 하시면서 냉큼 일어나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안타… 이곳엔 그런 게 없다. 가끔 중년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해드리는데 그 쪽이 참 미안해 한다.

    27. 앉아 있는 당신 갑자기 핸드폰이 울립니다. 당신은 전화를 어떻게 받으십니까?

    흥분해서 받는다. 반갑지 않더라도 반가운 척 한다. 전화가 끊긴 후 꼭 “뭐? 주소록이 지워졌다고? 내 전화번호 다시 줄까? xxx-xxxx이야. 응 안녕” 라는 대사를 꼭 넣는다.

    29. 특별히 기억에 남는 버스역이 있습니까? 있다면 사연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교회 가다가 브룩데일 역에서 버스를 하나 놓쳤을 때… 기온은 영하 25도인데 다음 버스는 50분이 더 있다가 온단다. 거긴 난로도 없었다. 아찔했다. 그 다음부턴 꼭 차를 타고 다녔다.

  • 개인 책임과 사회 책임

    성적이 죽을 쑤니 우울하고, 우울하니 친구들이 슬슬 피한다. 특히 이번 10월 학술회를 같이 계획하면서 친해진 애들이. 좀 걱정이 된다 – 혹시 친구들이 나 따라서 곤두박질 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것이야. 폭주하려면 혼자 폭주하시라. 그래, 이번 학기는 아무래도 뒤죽박죽이니 알아서 각개전투하고, 담학기 새 수업, 새 계절에 다시 만나자.

    근데 하나는 12월에 졸업하고 하나는 해외연수 간다. (마다가스카로 간다고 그랬던가? 좋겠다)

    음, 그래서 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부담되는 것이 제일 싫다. 부담 된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난 개인 책임으로도 버겁다. 사회책임과 개인 책임이 서로 얽히면 좋은 면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건강에 안 좋을게다.

    그래서 여럿이 모여서 하는 수업 프로젝트도 감당 못한다. 그 엄청난 책임의 압박은.. 한번은 다섯명이 모여서 대여성 폭력에 대한 10분짜리 발표를 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서로 일을 하고 두번째로 모이기로 한 그 주말, 난 감기몸살설사를 앎았다. 그리고 미안해서, 연락도 안 했다. 세번째 모임에 나가니 조원이 쥑일락 말락 하면서, 이거 어떻게 책임 질래! 이런 놈이 어딨어! 하는 거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책임 질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어찌 어찌 해서 발표는 무사히 지나갔지만, 그때 엄청 화낸 조원은 결국 철학과로 옮겨갔고, 딴 학생는 아마 오늘 날 까지도 내가 아시아판 마초라서 과제를 안 한 줄로 알 고 있을 거다. 나중에 인권 수업에서 서로 마주쳤거든.

  • [번역]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번역 작업 사이트: w.yokim.net/ExposingWhiteness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한국어 번역]
    백인성을 들추어 내고 그리고 비백인 공간을 모색 하며
    데이빗 뢰디거

    I CAME FOR THE ART [korean translation]
    Exposing Whiteness and Imagining Nonwhite Spaces
    by David Roediger
    artpapers.org/feature_articles/feature1_whiteness_M_J_03.htm

    다음 글은 현재 라구나 예술관 [Laguna Art Musem] 에서 2003년 6월6일 까지 전시중인 “백인성, 먼길의 구조[A Wayward Construction]”의 카탈로그를 위한 데이빗 뢰디거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백인성의 정체성 정치역학과 문화이론을 모색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인 이 전시회는 세 부분 – “White Out [“백인은 나가라” 또는 “하얗게 닦았네”], “거울, 거울…” 그리고 “백인성의 회색화”로 나뉘었습니다. 뢰디거 교수님의 글은 이 중 두 번째 부분 [거울, 거울..]에 대한 입문입니다. 편집부는 이 글을 위해 도와주신 전시회 장 타일러 스톨링 [Tyler Stallings]님과 라구나 예술관의 스튜어트 바이어 [Stuart Byer]님 및 데이빗 뢰디거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라구나 예술관 (www.lagunaartmuseum.org) 협찬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예술 세계에 발을 담갔을 때에, 열 살이 채 안되는 소녀가 가장 인상적인 한 마디를 남겼다죠. 그때 참말로 얼마나 백인성이 유리하고 유리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내가 세인트 루이스 [Saint Louis] 시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자그마한 예술관에 연설하러 갔을때 말이죠.. 때는 Ron Sakolsky의 최신 모음집 “초현실주의적 반란들” [Surrealist Subversions] 의 기념이였고, 난 1929년에 있었던, 세상을 백인주의를 넘어서 보려던 초현실주의 시도에 대해서 짤막한 연설을 준비했더레요. 아무래도 Yves Tanguy 님이 그린 것 같은 이들의 주요 작품 중 하나는 대서양이 아니라 태평양이 중심인 세계지도였어요. 이 지도를 보고 우리 아이가 “그거 왜 그리 후졌냐” 그랬어요. Tanguy 는 미국과 영국을 축소해버리고선 오세아니아를 확대했어요. 제가 원래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 작품이 표현하는 세계를 바꾸지는 못했다면, 적어도 우리들이 얼마나 과잉개발된 백인 세상에 집착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할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존 훼오도로프, 사무실 무당, 2001, 여러 재료
    John Feodorov, Office Shaman, 2001, mixed media, variable dimensions (courtesy the artist).

    아무래도 이 이벤트가 동네 축제 [homecoming – 미국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매년 모여서 미식 축구 보는/하는 행사]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니 좀 더 연설을 개인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리 준비한 것은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예술관은 제가 자라난 동에 위치해 있었고, 동네의 여전함과 급진적 변화는 제 혀를 자극했지요. 여름철 무더위와 미시시피 강 특유의 습도,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밖에 나와서 빵 굽는 벽돌위에 있는 풍경도 너무나 친근했죠. 고기 굽는 냄새는 아직도 술 빗는 곳의 악취와 마구 섞이고. 한 때 백인 다수이고 당당하게도 분리주의자였던 이 지역은 많이 [인종적으로] 섞이게 되었구.. 바로 풍覺?서쪽에 있는 쇼핑구역은 생명력 뛰어난 라티노 거점을 형성했고, 흑인 가정들이 늘어나면서 앞뜰과 뒷마당에서 고기 구워먹는 것과 더위를 피하는 것도 더 사람다와졌더라구. 오랫동안 북/남을 기준으로 분리되어있던 도시는 이제 남쪽의 깐깐하기로 소문난 동네에서까지 인종적으로 섞인 골목들이 생겼더라고.

    예술관 내의 다양함도 그에 못지 않았어. 호화롭게 치장한 예술 애호가들과 동네 젊은이들이 꾸역 꾸역 몰려들고 연설자 목소리가 들리라고 선풍기를 고맙게도 (?) 꺼 주니.. 그 열기가. 난 어떻게 실생활이 인종의 어리석음과 폭력을 비웃고 몇몇 백인들이 사는 비백인 공간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리저리 회상을 내비쳤어. 연설이 끝나고 예술관 주인과 나는 바깥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며 동네가 얼마나 바뀌었는 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 주인은 다인종 주민들의 연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날 즐겁게 해주었어. 그리고 우리는 무너져가는 벽돌 건물에 도착했는데, 여긴 아마추어 역사가들이 옛날에 지하 철도 [underground railroad – 노예 제도 시대 흑인들을 북쪽으로 빼돌리는 연결망] 의 거점으로 사용‰榮募 것을 증명한 적이 있어. 요즘 이곳 운동가들은 개발자들과 싸움이 한창이야 – 개발자들은 땅 좀 치우고 건물 짓자고 난리지, 운동가들은 여길 역사 보존 지역으로 만들자고 하지.. 노예 시대의 성스러운 비백인 공간이 이십일세기의 비슷한 공간을 형성하는데 일조한 셈이야.

    이 날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그게 아니고. 우리가 예술관으로 돌아오면서 열한살 정도 될까 하는 African-American 소녀를 만났어. 그녀는 개막식에 참석했다가, 집에 잠깐 들르고는 다시 돌아와서 아직도 행사가 진행중인지를 알고 싶어했어. 그렇다고 말해주면서, 과자도 있으니 가서 음식이랑 과자랑 집어가라구 그래줬어. 그랬더니 얘가 뭐라는 줄 알어? “과자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아주 강경하게 말이야 –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오호, 이 예술관은 졸지에 공동체 종합 예술 센타로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구나. 세인트 루이스의 가장 백인적인 공간 중 하나가 더 이상 그렇지 않고, 예술이 그 과정에 영향을 끼친 게야. [번역 주: 미국에서 예술은, 그것이 비싸던 대안이건 무료이건 저항 예술이던간에, 백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럼으로 인해 유색인의 대중적인 인식도 이에 제한되고]

    즐거움은 예술관 주인이 계속 얘기하면서 줄어들었지. 그의 말에 의하면, 도시 관리들은 유적이 지하 철도이건 아니건간에 싹 철거해 버리고 건물을 짓자는 대에 대해 아무 문제 의식을 못 느끼는 것 같았어. 아이러니 하게도 마약상, 포주와 창녀들을 성공적으로 다른 곳으로 보낸 다인종 연대는 그 값을 치뤄야만 했어. 자산 가치가 올라갔는데, 연대 구성원들은 집세를 내는 처지였어서, 갑자기 세가 세 배로 오르는 경험을 했지. 부동산 업자들은 이제 그 동네를 가까운 곳에 있는 분리주의 지역의 일부분인 것 처럼 소개를 했고, 재치료 매상은 폭락했구. 이 얘기를 들으며 전시회에 모인 위스콘신, 일리노이 및 미주리에서 부터 온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싼 전세를 원하는 예술가들이 가끔 “백인쪽으로 가는” 분리주의를 시작하는지에 대해 얘기를 했어. 어떤 이들은 다인종 동네 주민들에게 강도를 맞이하는 것이 콘도미니엄 개발자들을 맞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인 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산 가치를 일부러 낮춰버리면 (예를 들면 낙서 같은 전략) 그게 공동체 형성과 공존할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그 날 밤에 우리는 비백인 공간이란 것이 가능하면서도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에 대해서 배운것이야.

    수년 전 부터 기자들이 내게 던진 몇 가지 좋은 질문에 대해서 생각 해오고 있었다. 하나는 BBC 국제담당 기자가 생중계 인터뷰중 물어온 것인데, 좋은 의도를 가지고 백인다수인 청취자들에게 미국 백인성 비판적 연구의 핵심을 소개 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누가 미국에서 제일 백인스럽냐고 물어보았다. 망설이지 않고 “러쉬 림보 [Rush Limbaugh]”라고 대답하며 그가 흑인 구술 전통 [African-American speech] 중 minstrel show [노예 제도 시대 중 백인들이 얼굴에 검정을 칠하고 흑인 흉내를 내며 유희를 즐기던 연극 형태]와 유사한 점은 억제해 버린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게 왜 흥미로운 선택이냐 하면, 림보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희안하게도 표면상으로는 색깔 없는 것을 아주 대담한 인종 차별과 조합하기 때문이다. (1) 대답후 아차!, 하며 백인성을 보수주의, 남성성 및 의도적 인종 차별과 너무나도 가볍게 동일시 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빌 클린턴, 빌 게이트나 마돈나의 숨겨진 백인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마 백인 정체성이 문화 감각의 저 너머에서 정해진 기준과 스스로를 인종적으로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힘의 관계로서 작용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 더 도움이 ‰瑛만라.

    월스트릿 저널 기자에게서 받은 두번째 질문은 너무 친숙하고 명석했다. 우리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던지 그의 기사는 학계의 백인론을 바보로 만들어 버릴 것이란 것에 대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일부러 비판적인 그의 질문 –“미국에서의 백인적 공간을 찾으실 수 있나요?” –의 이면에는 백인성과 예술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쓸만한 문제가 포함되어있다. 당시에 우리가 위치 해 있던 미네소타 주를 언급하려는 유혹에 잠깐 빠져들었다가 그 대신 미국 몰 [Mall of America – 미네소타에 위치한 쇼핑몰로 미국 최대 규모임] 을 골랐다. 넓은 의미로서의 백인성-도회지-소비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훨씬 더 직접적인 형태의 인종차별 – 저녁이 되면 보안 관리들을 동원해서 흑인 꼬마 아이들을 몰에서 못 들어오게 하려는 조치 – 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좀 의외로 나의 두번째 대답은 인터넷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경계선이 녹아 없어지는, 인종 없는 테크노피아로 여겨지지 않던가? 사실은 영원토록 백인의 영토였으면서 말이다. (인터넷에서 “다인종 [interracial]” 을 찾아보면 미국의 인종/성 관념을 재활용하는 수천개의 포르노 사이트가 뜬다)

    BBC와 월스트릿 기자의 질문에 대해 몇년간 생각 해 본 이후 이제 나는 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백인스러운 사람: 마르타 스튜어트 [Martha Stewart] (그녀의 복잡한 백인 배경은 현재 그녀의 주식시장 부정과 동시에 조사되고 있다) 와 에미넴 [Eminem]; 콜린 파월 (이 사람의 이름은 내가 어딜 가서 “누가 가장 백인스러울까요?” 하고 물어보든 빠지는 날이 없다) 와 로라 부시 [Laura Bush]; 건설 업계 쪽의 노조 지도자중 아무나,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톰 브로커 [Tom Brokaw]와 , 윌리엄스 동지와 마티나 힝기스의 태니스 시합이 있을 때마다 그걸 체육 대 지성의 대결이라고 왈왈거리는 테니스 해설자. 이제 백인적 공간을 함 볼까? 월 스트릿과 NASCAR 이벤트; 유색인들이 제외 되는 클럽장과, 그들을 가두는 슬럼가 [barrio]; 교육 기관과 주류 교회들; 백악관 [아니라는 광고에도 불구하고] 와 베네통 [Benetton] 가게; 국가 미식축구 협의회 경기장과, 거, The O’Reilly Factor [미국의 인기있는 토크쇼]를 주최하는 놈 – 그 놈의 양 귀 사이에 존재 하는 공간.

    이렇게 다양한 명단이 존재함으로, 백인성을 들추는 것은 복잡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작가 및 운동사 아모자 세개의 강 [Amoja Three Rivers]님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상, 백인성은 “정치 연합”의 형태를 지니고 발전하였다면, 이는 힘, 민족, 성정체성, 스탈, 종교, 나이 및 젠더등에서 각각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것이다.(2) 법학자 체릴 하리스 [Cheryl Harris] 가 백인성이 그 주인들을 모여주게 하는 소유의 일종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가 동시에 증명하는 것은 [인종적] 소유는 다른 형태의 소유를 아주 많이 가진 자들이 가장 아쉬워 하고 동시에 –비극적으로- 자신들이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여서 백인성에 그토록 매달리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3) (백인들에 의한) 백인종 내부에 존재하는 다름과 비합리성에 대한 투정은 표면상의 일치와 새로운 문제들을 동시에 야기하므로 백인성을 간단하고 한마디로 설명이 되는 듯이 축소해버리는 이론만 가지고는 더 이상 건설적이지 못하다. “그 누구도” –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가 그런 적이 있지- “한 가지 [정체성] 만 될수는 없다”.(4) Kavin Buck과 John Feodorov의 작품이 보여주듯 예술이란 것은 흑인 여성주의자들이 적절하게도 “정체성의 [다중]동시성”이라 부른 그 무엇을 제대로 조명할 수가 있다.(5)

    에밀리오 꾸에또, 가버려따, 2002, 유화, 84×60 인치 (예술가 및 Los Angeles, Newspace 예술관 협찬)
    Emilio Cueto, Gone, 2002, oil on canvas, 84 by 60 inches (courtesy of the artist and Newspace Gallery, Los Angeles).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백인성을 들추면서 더욱 더 복잡해지는 것은 “백인” 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의미하는지, 인종이 아닌 것 처럼 보여주는 때 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에밀리오 꾸에또의 날카롭고 거의 전체가 백색인 “가버려따” (2002)는 여러 겹의 의미를 괘뚫는다. 물론 인종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만, Piet Mondrian 같은 이들의 작품과도 일맥상통한다. Mondrian은 백색을 다른 전제 하에 사용하곤 그의 작품에 대한 [다른 이들의] 읽기는 거의 인종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꾸에또의 작품은 우리들에게 인종으로서의 백인성과 그 밖의 공백성, 부드러움, 비어있음, 차가움, 죽음, 순수, 자아 발견등등의 백인과 관련된 것들과의 연결점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그런 연결의 방향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헤르만 멜빌[Herman Melville]이 이미 백오십년 전에 제시한 모비 딕의 소설 속의 “고래의 백인성”, 그리고 “하녀들의 타르타러스 강” [The Tartarus of the Maids] 에 나오는, 차갑고도 천천히 죽어하는 공장 여자 노동자들의 백인성 – 꾸에또는 색상을 인종을 초월하는 기표로 사용하면서도 그 인종적 의미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질문은 아마 “가버려따” (제목 좀 보시라!) 가 묻는, 캔버스가 항상 백인적인 공간인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아니라고 선언했을때만 결국, 그리고 혹시는 그러한 후에도 항상 백인적인 공간인지 물음일 것이다. 순수히 물리만을 생각한 것이 아닌 사회 관계를 고려 했을 경우, 캔버스라는 것이 다양한 색상과 그림들을 취한 후에도 밑바닥은 백인적인 것인가? 할리우드의 회색 스크린 처럼, 끝끝내는 흰색이 되는 것인가?

    백인성을 들춰내는 일을 좀 더 배배꽈보자. Richard Lou와 Robert Sanchez의 “미친 인류학자들” [Los Anthropolocos – 인류학자 Anthropologos와 미친 이들 locos의 합성어] (1992)와 Mark Greenfield 의 흑인 연출 [blackface minstrelsy] 에 대한 단상은 참 골치스럽다. 적어도 백인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하다 – 또는 그 누구라도 미국 문화를 탐색하는 이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백인 우월주의가 주류 인종이념 뿐만 아니라 “건너도 되는” 인종선의 넓은 경계를 이미 오래 전 그려 놓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Susan Gubar 의 “인종갈아타기” [racechange] 에 대한 연구 결과를 재확인 시켜준다. “Ch.D.s” (“치카니즘 박사들” [Doctors of Chicanismo]) 으로 등장하는 Lou 와 Sanchez는 누가 [인종적 선을] 건너는 것이 허락 되는냐하는 문제, 그리고 누가 누구를 대표할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후기식민지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미친 인류학자들”은 불변하는 감각과 구조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Greenfield가 씹어대는 minstrel 연기자들은 결국 관객 앞에서 화장을 하거나 지우거나 (또는 흰 손을 보여주기 위해 장갑을 벗는 다거나) 를 할 것인지 결정 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서 그들의 백인성을 완전히 드러내고 아주 적절하게 인종 건너기의 과정 자체를 지배하는 것이 연극의 일부였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 아닌가?

    피터 에드룬드, 노예 주의 정부 새 (J.J.Audubon 다음), 2001, 유화, 40×28 인치 (예술가 협찬)
    Peter Edlund, State Birds of the Slave States (After J. J. Audubon), 2001, oil on canvas, 40 by 28 inches (courtesy the artist).

    역사를 재 구성 하는 것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부분은 최근 성숙해가는 노예 제도와 Jim Crow 제도 보상에 대한 논쟁의 관점에서 볼 때 크나큰 정치적 의미가 있다. Peter Edlund의 아름다운 “노예 주” 새의 형상화는, 이 새들이 십구세기 John James Audubon이 기획하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예술과 분류화 작업, 과학, 자연 그리고 (Audubon 의 관점에서) 다중인종의 일을 백인의 것인 마냥 지나친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합성은 다시 무엇이 “인종적”이며 무엇이 아닌 듯히 보이는 가에 대한 사색 그리고 백인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중요 지점에 묶여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힙합 시수로 “모든 노예의 이야기는 현재형 동사를 쓴다”(7) 라고 하는 The Coup [곡 이름] 처럼, Edlund 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Kelsey Fernkopf, La Brea Faberge, 1999, mixed media,17 by 5 by 7 inches (courtesy the artist and Howard House, Seattle).

    역사를 재 구성 하는 것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부분은 최근 성숙해가는 노예 제도와 Jim Crow 제도 보상에 대한 논쟁의 관점에서 볼 때 크나큰 정치적 의미가 있다. Peter Edlund의 아름다운 “노예 주” 새의 형상화는, 이 새들이 십구세기 John James Audubon이 기획하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예술과 분류화 작업, 과학, 자연 그리고 (Audubon 의 관점에서) 다중인종의 일을 백인의 것인 마냥 지나친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합성은 다시 무엇이 “인종적”이며 무엇이 아닌 듯히 보이는 가에 대한 사색 그리고 백인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중요 지점에 묶여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힙합 시수로 “모든 노예의 이야기는 현재형 동사를 쓴다”(7) 라고 하는 The Coup [곡 이름] 처럼, Edlund 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John Feodorov, Erika Rothenberg 또는 Kelsey Fernkopf 의 일련의 작품들은 백인성을 일부분 농으로, 일부분 심각하게 일상화된 소비의 객체 사이사이에 위치시킨다. Fernkopf는, 백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온갖 똥 더미들을 던져줌으로서 독특한 방식으로 문제 제기를하는 것이다. 백인성과, 행복을 살 수 있다는 거짓 약속간의 연결을 펌프질 함으로써, “안전”과 “깨끗함”이란 단어를 말함으로써, 그는 James Baldwin의 저서 “입장료” [The Price of the Ticket] 에 집대성되어 있는 백인성, 하루 일상과 윤리에 대한 분석심리학적인 방법을 취해서 인종과 항문성 [anality?] 및 자본주의에 대한 에세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8). 그런가 하면 Kavin Buck의 백인성, 헤테로성 [straightness] 그리고 진일보의 상호 연관은 초현실주의자 Franklin Rosemont 의 최근 주장인 예술가의 책임중 하는 백인을 몽상에서 깨워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9)

    본 전시회의 “White Out” 부분에 약간 망설여 지는 곳이 있다면, 이는 두 분야에 걸쳐 나타날 것이다. 첫째는 백인 여성들이 지배적 인종 지위를 소유함으로서 그들이 힘을 지니게 됨과 동시에 찬양됨과 이등시민 지위에서 “보호된” 과정을 모색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미 학계에는Ruth Frankenberg, bell hooks, Lewis Gordon, Ida B. Wells, Audre Lorde, Kate Manning, Vron Ware, Louise Newman 과 Cheryl Harris 에 의한 백인 여성과 인종에 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예술 분야에는 이에 해당하는 주장이 존재 하지 않는 것은 좀 안타깝다.

    문학 비평과 사회과학은 높은 기준을 가지고 백인성을 공포의 종류로 이야기 해 왔다. Ralph Ellison 과 James Baldwin 에서 부터 Leslie Marmon Silko, Paul Gilroy 와 Cherrie Moraga에 이르는 일련의 작가들은 백인성이 자신 자체를 유색인에게 대한 무자비한 폭력 – 채찍, Ku Klux Klan, 점령군, 흑인 처단군 [lynching party], 노예 초소 [slave patrol], 감옥 제도, “소수자” 동네와 인디언 지역에 버려지는 공업 독소등등 – 으로 그려냈다. 이들은 또한 백인 의식의 비틀어진 형성 과정에는 이러한 테러 행위를 보고 그리고 행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흑인 처단군들은 현장에서 서로를 축하하고 점심을 먹고 가족 단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늘날의 [미국] 테레비전 국가는 백인 경찰이 젊은 African-American 남자들을 때리는 장면들을 슬로 모션으로 끝없이 본다. 많은 African-American 들은 이러한 공격을 테러로 느끼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운전 면허증을, 어떻게 꺼내야 혼수 또는 죽음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친다. [번역 주: 주머니에 손 넣으면 안 된 다지요] 이런 주제가 등장하는 라디오 토크쇼에 전화하는 백인들은 이러한 폭력을 경찰관이 “피부색을 막론하고” 문제 있는 아이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문제쯤으로 보는 대에는 참 재주가 뛰어나다.

    하지만 어쩐 이유인지 백인의 테러는 전시회에 그리 크게 나오지 않았다. Andres Serrano의 Klansman 시리즈와 James Casebere의 섬짓한 작품들의 예외가 있었지만. Casebere는 백인적 공간들을 –그 중에는 유색인들이 묶여 있는 공간도 포함되어 있다- 모색하고 해체하며 의문을 제기하기 위하여 여러 대륙을 포괄한다. 그 만큼 시의 적절하게 백인성과 테러를 역사 및 초국가적으로 묘사한 작품도 없다. 이 전시회의 괘도를 통해 우리는 백인성을 해체하고 그 정체성에서 출발해 더 나은 무엇을 수면에 떠오르게 할 수 있다는 암시를 읽는다. 허나 Casebere의 유령 같은 그림들은, 그리고 그가 말하는 백인성과 테러의 상관관계, 그리고 소유와의 관계는 그와 같은 수면 부상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모색하게 될것인지에 대하여 따끔한 일침은 놓는다.

    케이빈 벅, 무너진 계단, 2001, 고무와 나무, 바닥 설치물

    Kavin Buck, Collapsed Staircase, 2001, rubber on wood, floor installation, 48 by 120 by 72 inches (photo by Antony Photography courtesy the artist and South La Brea Gallery, Inglewood, California).

    우리가 들추고자 하는 백인성이 겨우 개인적인 문제 또는 몰이해 / 나쁜 습관 이라면 별 고민 없이 감성적인 만남을 추구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단정해 버렸을 것이다. 허나 백인성은 개발자, 상사, 공해자, 경찰, 노동 조합 지도자, 단체 리더 또는 선생들 사이에서 인식되고 지켜지는 인식적 틀 [category]로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틀로써 백인성은 African-American 젊은이들이 백인 젊은이 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일곱 배나 높으면서 동시에 흑인 가족이 일 달러의 자산을 쥐고 있으면 백인 가족은 육 달러를 가지고 있는 구조를 지탱한다. 이러한 구조는 백인성 내부에서 나타나는 개인적 다름을 차단한다. 이 구조는, 인종적 차이의 이념을 강화하고, 백인성의 선호도를 높이며, 과학과 예술이 이러한 인종차별적 거짓들을 깔아 뭉개는 현실 속에서도 건재한다.

    백인 우월주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이러한 전시회 아래 모인 총체적 재능 그 자체로는 가능치 않다. 할수 있는 것은 관객에게 백인성의 역학과 “별다른 것으로 표시치 않은 경우 백인”인 사회에서 사는 부작용을 이해 할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백인성을 노출시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캔버스, 예술관 또는 국가가 항상 백인 위주일 것이라는 패배주의를 경계하는 것.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은 월스트립 저널 기자의 질문을 넓히며 어떻게 하면 비백인 공간들을 찾아내고 촉진할수 있을 까 하는 질문을 품는 쪽으로 우릴 밀어줄수가 있어요. 구조적인 불공정함이 항상 그런 공간을 없애버린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Notes
    1. David R. Roediger, “White Looks and Limbaugh’s Laugh,” in Colored White: Transcending the Racial Past (University of California, 2002): 44–54. See also the important recent collection edited by Kymberly N. Pinder, Race-ing Art History: Critical Readings in Race and Art History (Routledge, 2002).
    2. Amoja Three Rivers, Cultural Etiquette: A Guide for the Well-Intentioned (Market Wimmin, 1991): 8.
    3. Cheryl Harris, “Whiteness as Property,” Harvard Law Review 106 (June 1993): 1709–91.
    4. Edward Said in a question-and-answer session at Macalester College, Saint Paul in 1999.
    5. See, for example, Rose Brewer, “Theorizing Race, Class and Gender,” in Theorizing Black Feminisms: The Visionary Pragmatism of Black Women, ed. Abena Busia and Stanlie James (Routledge, 1993): 16.
    6. Susan Gubar, Racechanges: White Skin, Black Face in American Culture (Oxford University, 1997).
    7. Boots Riley, “Everythang,” from The Coup’s CD Party Music (Tommy Boy, 2001).
    8. Richard Dyer, White (Routledge, 1997): 75–76, speaks succinctly to the psychoanalytical literature.
    9. Franklin Rosemont, “Notes on Surrealism as a Revolution against Whiteness,” Race Traitor 9 (summer 1998): 29.

    데이빗 뢰디거 [DAVID ROEDIGER] 는 일리노이주 Urbana-Champaign 대학의 Babcock 역사 교수입니다. 최근 저서로는 “채색된 백인: 인종적 과거의 초월” 이 있음다. [Colored White: Transcending the Racial Past] (University of California, 2002). [주: 이 교수는 백인론을 학문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교수이기도 합니다]

  • [자학] 자유 인문과 개인/사회

    (아무래도 공개된 제목은 한글로 시작하는 것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겠지?)

    아무로 날 모르는 공간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좀 쏟아내면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해소 되지 않을가 싶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대학 내에서의 개인/사회 얘기인데 그에 대한 배경이 필요해서 자유 인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영양가 없는 개인 얘기이니 -일종의 공개된 자학 自虐 – 알아서 하셈

    Liberal Arts [Humanities] (자유 인문)

    내가 이제 막 졸업하려고 하는 이 대학교는 사립 자유인문 (private liberal arts) 학교이다. 자유 인문이 뭔지는 2학년이 되서야 대충 감을 잡았다. 대략 모든 학문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배움의 전문화를 사양하고 학생들이 어떠한 분야라고 접할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는 공간이다. 철학과 화학 이중전공을 하든지, 미술과 경제학을 하던지, 물리와 젠더학을 하던지 학교에서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히려, 권장하는 편이다.

    이러한 전통은 그리스/로마의 고전인문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우주적 인간이라나.. 그리고 초기에는 사립대 (동부의 프린스턴 예일등등)에 집중되었고 근간에는 주립대학에도 College of Liberal Arts 라는 형태로 퍼지는 것 같다.

    이곳 마캘리스터는 상위급에 속하는 자유인문교중 비교적 새롭게 등단했다. 1991년에 3억달러에 상당하는 금액의 기부금이 들어오면서 (당시 학교 총 자산이 4억 달라였다. 그 충격을 상상해 보시라) 엄청난 투자를 통해 지역권 상위 학교에서 국내 상위권으로 껑충 뛰어오른 케이스다. 그로 인해 인지도와 입학 경쟁률이 낮다. M은 웨버가 말하던 “새 자금” [new money] 에 바로 우리가 해당한단다.

    다른 학교와 비교해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수업실의 평균 크기가 17명이라는 것은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참 잘 난) 교수가 학생들을 일일히 신경 써주고 그들의 연구물들이 최고급이 될수 있도록 지도 해줄 수 있는 환경이 된다. 교수들은 이곳에 하루에 거의 12시간씩 근무하며 학생에게 최고를 요구한다.

    나 같이, 고등학교의 기대도가 낮은데애 불만족을 느끼던 부르조아 학생에게는 최고의 환경이다. 아드레날린 농도가 엄청 높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여기서부터.

    페이퍼 하나 쓰기

    연구물이 최고라는 것은 페이퍼를 한번 써보고, 한번 훑어보고, 교수에게 개념을 이야기 해서 논조가 약한 부분을 뜯어고치고 하여간 개별적인 작품으로서는 어딜 가서도 당당히 내놓을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이야기한다. 실제적으로 결과물이 최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기본 기대가 존재하니 이걸 만족하려고 글을 쓸때마다 꾸뻑 죽는다. 몇달간 죽어가며 (과에 따라서) 실험실/도서관/현장 연구하고, 그걸 또 며칠 걸려서 써대고, 그리고 드래프트에 대해서 교수가 뭐라뭐라 이야기 해주면 그걸 또 추가 연구하고 밤새며 다시 쓰고 대게 한계에 도달했다… 더 못하겠다.. 징그럽다.. 할 때 쯤 자포자기 한 상태로 페이퍼를 낸다. 보통 제시된 한계 날짜보다 하루 정도 늦는다. 나름대로 독창성이 있는 연구물이라고 생각한다. 일주일만 더 투자하면 깔끔하게 마무리될수 있는 페이퍼.. 하지만 그 다음 과제물을 끝내려면 그 페이퍼는 물 건너간 상태.

    첫 삼년은 좋아라 하며 일을 했었다. 혼신을 바쳐 글을 쓴다는 것이 매력적이고, 수업메이트도 다 기준이 이 정도이고, 교수가 자기 개인 생활 희생해가면서 까지 읽어주고 지도해주는 학교에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힘이 안된다. 학교 나와서 그냥 일이나 하고 싶다. 학문의 세계는 끝이 없다. 반론에 반론에 재반론.. 끝이 보이면 그 때 나와서 그 개념을 같고 일을 하면 되는데, 결론은 끝없는 논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구조적 한계가 보이니 성적이 급강하한다는 것이다. 졸업도 못하고 쫓겨날 만큼..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그러지, 사유는 환경에 좌우된다고. 사실 관계가 바뀌어서 내가 수업 진도를 못 따라가니까 나름대로 변명을 대는 것이 아닐까.

    인류학 이론 수업에서 두번째 에세이를 써야 한다. 페이퍼도 아니고 겨우 6페이지 짜리 에세이다. 며칠을 고민해서 겨우 생각한게 개인의지라는 개념이 뒤르크하임이 suerorganic을 고안한 그 때부터 이리 저리 끌려다닌 개념이었으며 (정확히는 초기 진화론주의자.. 스펜서 및 모르건의 그것과 Boasians의 역사적 정의론사이의 쟁점) 그것이 말리노스키에 이르러서 협의를 보는 듯 하다가 다시 신진화론주의가이 큰 호응을 일으키니 포스트모던주의에서 본질적 부정을 통해서라도 개인의지를 보호하려 했다는 논지였다. 근데 제출 날짜가 지난 화요일 오후였고 이 주제를 겨우 생각한 것이 월요일 밤. 제일 큰 문제는 아직 내가 읽은 사상가들 중 19세기 후반기 Boasians/초기 진화론자와 1940년대의 신진화론 및 1970년의 포스트모던 사이에 있는 사상가들을 하나도 안 읽었다는 것이다. (1920년대의 구조주의, 기능주의 및 구조기능.. 말리놉스키, 에번스 프릿처드 그리고 랫클리프 브라운.. 그리고 레비스트로) 그러니까 이론의 역사를 세세히 엮어야 하는데 중간 지점이 완전히 공터상태.

    얘네들 못 여태 읽은 것 채우며 밤 세우고, 일하는 곳에도 이멜 띄우고 못 오겠다고 하고, 화요일 오후에 급히 급히 글을 쓰다가 결국 제출 시간 (화요일 5시)에 못 냄. 보통 과제물이 있을 경우 늦게 내면 얼마씩 점수가 깎이는 게 있는데 내가 받은 과제물에는 “화요일 5시까지 낼 것. 늦은 페이퍼는 안 받을 것임” 이라고 적혀 있다. 난 어떻게 되는 거야, 다 망친 건가? 그러니까, 여기서 F를 받으면, 현재 C- 상태인 이론 수업에서는 학점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고, 학점을 못 받으면 금년에 졸업은 불가능하게 된다. 금년에 졸업을 못하면 졸업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재정 보조금이 더 안 나오고 학기당 일만오천불에 해당하는 등록금 전액을 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럴 사정이 아니므로 자퇴로 이어지겠구나. 화요일 저녁 내내 스스로를 가책하며 어떻게라도 페이퍼를 마무리 해보려고 했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라고 생각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자살할 여건은 안 되는 것 같았다. 아직 공부 말고도 해보고 싶은 일이 널렸으니. 근데 자살에서 대학 중퇴로 생각이 이어지자 페이퍼 쓸 생각은 나질 않고 그 후 어떻게 할까라는 잡념만이..

    죽고 싶은 화요일이 지나고 수요일 아침, 수업에 들어갔다. 교수는 내가 페이퍼 제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눈치 채지 못 한 것 같다. 수업 끝나고, 점심 후 교수의 사무실에서 “잠깐” 페이퍼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했다.

    나 왈: 교수님… 페이퍼를 아직 못 썼는데, 점수 깎이고 오늘 오후에 내면 안 될까요? [이때만 해도 그 날 중으로 끝낼 자신이 있었다.]
    교수: 엉? 아직 페이퍼를 제출 하지 않았어?
    나: 네… [죽고 싶다]
    교수: 음. 오늘 제출하겠다고.. 그래 그럼 이멜로 보내라
    나: 네? 벌점 없이요?
    교수: [엄청 침착하게, 약간의 웃음까지 띠며] 응, 이멜로 보내.

    헉.. 아직도 못낸 학생들이 여럿이었다는 얘기일까, 아님 내가 지금 빌빌거리는 과목이 여럿이라는 것을 알아서 봐준 것일까. 하여간 감사하고, 주제에 대한 얘기를 좀 했다.

    나: 이러새 그래서 보아스가 주장한 내용이 초기진화론자들이랑 서로 [개인의지]를 이론상 차지하려고 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포스트모던이 어떻고, 자결주의가 어떻고.. 그룹 의지가 어떻고..
    교수: 잉? 보아스는 그룹 의지와는 거리가 있는데? 역사특성주의 말고도 보아스가 주장한 것 diffusionism [문화 전파론]이 있잖아.. 네가 말하는 그룹 의지는 오히려 보아스가 주장하던 것과 상치되네.
    나: 윽, 헛 짚었네요
    교수: 너 논지를 첨부터 다시 생각해야 겠다.
    나: 어쨌든 오늘 오후 7시까지 낼께요.
    교수: 응

    그러고 교수실을 나섰다… 그리고 페이퍼 일은 하나도 안 했다. 학생그룹 예산이 오늘 까지 내는 것이시리..

    페이퍼를 쓰려 컴퓨터 앞에 앉으니 우선 전제가 틀린 글이라 신경이 쓰인다. 무시하고 쓰려니 지난번 페이퍼 냈을데 교수가 적어준 비평이 생각나서 움찔 움찔. 결국 못 썻다.

    그리곤 7시에 있는 다른 수업에 가서 영화도 보고, 느긋하게 집에 돌아와서 걱정을 약간 하다가, 잤다. 어제 목요일도 전혀 페이퍼 일을 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제발 좀 하루 더 늦게 낼 때마다 점수가 깎이면 차라리 좋으련만.. T.T

    개인/사회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너무나도 개인화되었기 때문에 이는 엄청난 힘이 된다. 자그마한 실수도 집어내주고, 글을 쓸때마다 날카롭게 논지평가를 해준다. micromanagement 가 맞다. 완전히 학술 파트너다. 근데, 조금 이 관계를 벗어나서 덜 촘촘한 강의/학생 관계를 성립하기가 불가능하다. 나 이거 안 하고 그냥 F 주세요.. 하면은 교수가 온갖 압박을 넣어서라도 일을 하게 만든다. 지난 봄학기때는 두가지 수업에서 마지막 페이퍼를 못 내고 그냥 F 주세요 했다. 지금까지 평균이 A이니, F가 20%라도 C+ 선에서 학점 받는다라는 생각.. 기숙사 문닫는 날 교수 둘다 내 방으로 전화를 걸어서 너 제 정신이 있냐, 지금 까지 A에 해당하는 일 했다가 왜 점수를 망치냐. 제출 날짜 연장줄테니까 제대로 해라, 라고 압박을 넣으셔서 결국 여름 내내 연구만 했다. –;

    가끔은, 가끔은 수업을 그냥 계약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일 하면 A 받고, 안 하면 F 받는.. 날 성공시키려 하지 말고, 그냥 대학 지나가는 학생으로 바줬으면.. 기대가 높으니 부담스럽고 스트레스가 팍팍.

    아직도 페이퍼 못 냈다. 워래 제출일이 화요일. 삼일 늦었구만. 마무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아마 내일 중으로 낼 수 있을 것 같다. 월요일에 교수를 만나서 뭐라 얘기를 해야 하나. 이젠 죽고 싶은 생각도 안 난다. 걍, 해탈 한 것 같다.

    제목이랑 내용이랑 맞는지도 모르겠다.

  • [펌] Red v. Blue

    Red v. Blue

    Carl the Gee-Whiz Wonder Boy, 11/04/2004

    저 시뻘건 지역을 보쇼

    하지만 이를 제대로 섞어서 본다면 미국이 훨씬 덜 나뉘어 보입니다.

    이게 최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