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노바리. 순도 100%의 인종주의

노바리님이 파농을 읽으셨단다.. 어, 내가 뭘 덧붙이겠나. 눈에 확 확 들어오는 구절은 하이라이트 치다.

순도 100%의 인종주의 | 2004.04.30 14:47 추천 1
출처: 노바님의 블로그 (현재 지워졌음) http://mediamob.co.kr/vedder

진보누리 한 게시물에 172개의 쪽글이 붙었다. 주제가 그래서인지 조회수는 172개란 쪽글에 비하면 그리 높진 않지만. 지리한 이 쪽글 리플은 약 4, 5사람이 도배를 한 것인데, 신원이 그럭저럭 일관된 사람은 나, V님, 그리고 최근 勞動子이며, ‘…에게’라는 아이디를 쓴 사람과 ‘쏘띠는 외국인 꼬붕’이라는 아이디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나와 V님이 같은 편(?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지만)이다. 그리고 우리가 확인한 것은…

말로는 국내 저임금 노동자들의 이익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들의 그 ‘말뿐인’ 노동자 타령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설일용직 노동자의 집회장 앞에서 멈춘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실제로 일자리를 빼앗기고 눈물을 삼키면서도 이주노동자들을 미워할 수 없어 하는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이들의 작태를 보고 과연 환호할까.) 그들은 걸핏하면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한국여성을 대상으로 저질러지는 성범죄를 언급한다. 그들이 여성의 인권을 걱정해서? 농담도…

그들이 말하는 인권은 피부색 앞 1km 앞에서 멈춘다. 하지만 피부색 앞에서 멈추는 인권이란 언제든지 성별 앞에서, 섹슈얼리티 앞에서, 종교 앞에서, 장애 유무 앞에서, 계급 앞에서 멈출 수 있다. 그들이 분노의 기제로 사용하는 ‘한국여성의 피해’란 결국 ‘자국여성을 어디 외국인 따위가 건드려!’이며, 이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적대감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소유권적 인식을 드러낼 뿐이다. 그들은 실제로 여성의 인권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남성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주여성에 대한 성폭력, 성매매 강요, 그리고 한국여성을 향하는 한국남성들의 성범죄에는 눈을 감기 때문이다.)

지리한 쪽글 논쟁에서 확인한 것은 순도 100%의 인종주의다. 쪽글이 120여 개에 도달했을 때에야, 나는 그 긴 쪽글 플레이의 뿌리란 결국 ‘인종주의적 증오감’인 것을 확인했다. 물론 졸라 허탈하긴 했지만, 결국 이러한 저러한, 통계를 들이대며 객관적인 척 하고, 내국인 저임금노동자의 존재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며 개혁적인 척 하는 그 근저에 존재하는 건 결국 인종주의, 순도 100%의 인종주의란 걸 끄집어 낸 건 분명 하나의 작은 성과일 것이다. 에일리언이 드디어 숙주의 몸에서 나와 그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그네들이 둥지를 튼 사이트와 카페를 둘러보고, 순금보다 더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순도 100%인, 그러나 그것이 결코 인종주의가 아니라고 우기는, 그 인종주의를 직접 대면한 것이다.

여성주의적 감수성으로 이주노동자 운동에 접근했고, 나의 여성주의적 감수성은 상당부분 흑인운동에서 자극을 받기도 했다. 특히 스파이크 리의 한창적 영화들과 마틴 루터 킹. 말콤 엑스와 프란츠 파농의 경우는 간접적인 접촉이 있었다.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친구들과 함께 나눈 대화들도 약간의 간접적 자극들. 그렇기에 ‘인종주의’에 대해 아주 낯설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순도 100% 인종주의를 직접 맞닥뜨리고 확인한 것은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 예상정도를 넘어선 그 순도와 엄청난 깊이에 느낀 건 공포감과 놀라움이었다.

인종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민족 우월주의 등은 사실 우리 삶에 의외로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긴 하다. 단순히 백인을 숭앙하고 흑인이나 다른 아시아인을 멸시하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만주벌판 말 달리는 기개’ 등에서 우리를 묘하게 흥분시키는 것, ‘한단고기’가 유행하던 시절 그걸 읽으며 자랑스러워하던 기억, 혼혈아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우리’ 안에 있는 이것들의 싹은 빙산의 일각, 그 뿌리는 너무나 깊고 넓게 뻗어있다. 몸에 스며드는 건 서서히 자신도 깨닫지 못하게, 이지만, 그것의 존재를 깨닫고 파내려 할 때 그것은 오랫동안의 의식적이고 실천적인 투쟁에 기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제대로 된 인종주의에 대한 개념도, 인식도, 투쟁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형체조차도 불분명해 보인다.

백인들 사이에서 연구되는 반인종주의는 분명 참고자료는 되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 연구는 되지 못할 것이다. 아시아인들 사이의 인종주의는 백인들의 인종주의를 사대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데에서 더욱 복잡한 그물의 코를 감추고 있다. 내 경우 한국에서만 살아왔다는 경험은 더욱, 반인종주의에 대한 감을 간접적으로만 잡게 한다. 게다가 내가 간접적으로 접한 반인종주의란 영화를 통해서이고, 이 영화들은 대부분 백인들이 만든 것이다. …

내 안에 인종주의적 편견이란 뱀은 과연 어떤 모양의 또아리를 틀고 있을지. 겁이 난다.

아흑, 싸부님..

scrapbook | 05/01/11 00:39 | 관련글(트랙백) | 댓글(2)

노바리 05/01/11 20:13 x
‘간접적인 접촉’이라니까요. 책 아직 안 읽었단 얘기. 호홍~ 이 주제로 이야길 하면서 책 읽은 친구한테서 얘기만 들었어요. 꼭 읽어야지 리스트에 올려놓은 사람이긴 한데 아직… ^^;; // 211.239.22.108

김용호 05/01/11 20:50 x
거.. 친구복이 상당하십니다. 이민노동자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파농까지 끄집어내다니. orz // 141.140.1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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