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Yongho Kim 김용호

  • 그의 부인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정

    미국인학 로고. 별 모양은 원래 “깃발이 피흘리고 있다” [The Flag is Bleeding]이라는 그림에서 따옴

    이번 글 이름은 전부다 가명처리하였슴. 사안이 좀 민감해요.

    금요일 노닥거리며 이번 학생보조금재정제안서를 발췌한 아해들과 별별이야기로 노닥거리고 있다가..

    레아: 응 근데 이번에 학장에 지원해서 면접 및 공개 발표 차 오는 본사이 교수님은 자길 고용하려면 자기 부인도 고용하래. 그분은 여성학 교수고 다른 곳에서 가르치지만 부부 중 하나가 옮기면 같이 옮겨야 되는데 부인 직장문제도 같이 해결해 달라는 거야. 그리고 우리 여성학과는 그분 부인의 접근론을 껄끄러워 하거든. 참 담도 큰 교수지.
    용호: 뭐 그런 교수가 다 있냐.. 자신이 패캐지도 아니구.
    레아: 그래서 본사이는 아무래도 반대해야 겠어. 여성학과 쪽은 그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어.

    오늘 도서관에서 레아를 만나니 다른 아이와 또 그 얘기를 하고 있다.

    레아: 아 그래?그 교수가 자꾸 자기 부인을 끌어들이고 왈왈왈..
    용호: 또 그 교수 흠.. 오늘 프레셔스는 어땠어? [오늘의 교수에 대한 은근한 기대. 프레셔스가 미국학 학장이 되면 라티노학이 현재 마이너 계획에서 메이저로 바뀔 가능성은 증폭된다.]
    레아: 응 라티노학과 흑인학이 학문 및 운동적으로 근원을 같이 한다는 접근은 좀 진부했어. 새로운 얘기도 아니고 뭘.. 근데 이야기가 쭈욱 라티노학 및 흑인학이 어떻게 비슷하다는 점만 다루었지, 페미니즘 같은 건 어떻게 할거냐 라고 물어보았거든, 그 교수가 “아 그렇죠 깜빡했음” 하면서 부연 설명을 덧 붙이는 데, 그것 참 겨우 마지막에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석연치 않더라구.
    용호: 야 난 국제학만 이 문제에 관여하는 줄 알았는데 여성학도 만만치 않구나.
    레아: 우리 여성학이 아무래도 미국학 초기 비교북미학일 때 부터 관계가 돈독했잖니. 발언을 할 때면 해야지. 근데 국제학쪽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구?
    용호: 응. 국제학 소쉬르 학장이.. 후보를 보더니.. 대뜸 “학장이 되려면 아무렴 박사학위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버럭! 1번 후보 비추, 4번 후보 비추, ” 뭐 이렇게 엄포를 놓아서 미국학 교수들은 불편해 했다나. 그럼 첫 후보 루소 교수님은 어땟어?
    레아: 응 그녀는 괜찮더라구..
    용호: 그러니까 여성학은 후보 셋중 둘은 비추한다?
    레아: 응 특히 본사이 교수는 절대 고용되어선 안되. 고용하는 것은 좋은데 그 부인은 우리 여성학과에서 원하지 않어.

    그리고 밤에 다른 아해를 만나서..

    녹두: 본사이는 넘 좋은 놈이라서 안되. 스타급이야. 예를 들자면 클린턴이 울 대학에 와서 가르친다고 해봐. 걔가 우리 대학에 만족할까? 잠시 놀다가 또 떠날거야.
    용호: 스타급 교수가 오는 게 왜 나쁘지? 갈 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녹두: 미국학 학장은 오자 마자 떠나면 안되. 여기서 장기간 근무하며 학과를 크게 키워야 하는 책임이 있어. 본사이 같은 쟁쟁한 넘은 여기가 도시 환경이라 좋아라 하고 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장기적으로 봤을 떄 뽑으면 안되.
    용호: 그런 교수가 왜 이 쪽으로 올려고 할까? 이상하네?
    녹두: 몰러. 걔가 오면 이제 인터뷰를 해봐야지.
    용호: 참 기분이 좋아보인다.
    녹두: 드디어 학과가 정식으로 자립잡으려는 데 당연하지

    학장 하나 뽑는데 목을 길게 빼어 구경 및 참견하는 이들 및 세력들이 가지가지하다. 나도 포함되지?

  • 일은 누가 한다냐

    http://www.emusic.com/album/10729/10729166.html (더 보기…)

  • 차이를 넘어서: 인종제/다문화 애인 사귀기 토론회

    차이를 넘어서
    인종제/다문화 애인 사귀기 토론회

    [광고용 글]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은 인종, 문화 그리고 종교를 넘어서 연애하며 결혼도 하고 있는데,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무엇인지? 어떻게 극복할수 있는지? 사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지, 아니면 사회의 시선과 문화의 장벽에 부딧히는지? 이런 이슈에 대해 배우고 또한 문제를 던지려면 와보세요. 그리스 음식으로 대접하겠습니다. “다리” [Bridges] 학생 단체 주최

    Dating Across Difference
    Come to Bridges’ Annual Interracial/Cross-Cultural Dating Forum!
    When: Thursday, December 2 Time: 7:00 pm Place: 4th Floor Old Main

    [Advertising] It is becoming increasingly common for people to date (and marry) outside of their race, culture and/or religion. While they say love conquers all, oftentimes there are many seemingly unsurpassable obstacles impeding the success of these relationships. What are some of these problems? How can they be solved? Does love really conquer all, or is it trumped by societal views and cultural norms? Come learn about some of the issues and pose some of your questions. A light Greek appetizer spread will be served.

    =-=-=-=-=-=-=-=-=

    이건 창이님을 위한 잡담인데. 나름대로 흥미로왔던 토론회라 할수 있겠소. 위에 해당하는 연애 및 결혼을 한 학생 및 학교직원 네분을 초대하여 그들의 이야기 및 연애 관련 이야기를 나눈 장이었는데 이들이 누군지 소개를 하자면

    (자기 자신을 소개한 그대로) ㅅ군은 전통 [orthodox] (문화적) 유태인으로써 현재 카톨릭 라티나를 사귀고 있으며, ㄱ양은 흑인/노르웨이계 미국인 혼혈로 여러 배경의 남친을 두어보았고 현재는 아프리카인 남친.. 그리고 ㅋ양은 미국 흑인으로써 백인을 사귀고 있고 ㅁ분은 쿠바/스페인/바스크/아이랜드계 혼혈 게이로써 하와이 원주민 게이를 사귀고 있음. [ㅅ군은 그가 백인 남성이라 일부러 데려온 것임]

    (발언 내용은 시차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님)
    =======================
    ㅅ군 왈.. 전통 유태인은 옛적 집단 강간의 경험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유태인의 후계를 순전히 어머니의 계보로만 봅니다. [바깥 인종에] 강간을 당해도 어머니가 유태인이면 자손이 유태인이라는 논리를 만들려고 생겨난 것인데.. 그런 연고로 나의 부인이 유태인이 아니면 난 논의 밖에 있고 자손은 유태인이 아니게 되요. 난 랍비가 될 계획이기때문에 이러한 전통 유태인의 법률은 절 화나게 하는데, 랍비는 순수한 유태인 자손을 남기지 않으면 될수가 없기 때문에 비유태인과 결혼하면 랍비가 될수 없는 현실이 통탄스럽습니다..

    ㄱ양. 전 일정한 인종적 틀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별별 오해를 다 받어요. 라티나라느니, 원주민이라느니 등등.. 그런데 사람이 제가 흑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흑인의 이미지에 맞추여 보려고 해요. 예를 들면, 난데없이 “흑인이라고! 춤은 잘 추겠구나!” 또는 “머리는 왜 이리 흑인 답지 않게 땋았니?” 많은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보았고 백인도 사귀어 보았고 지금은 아프리카 흑인.. 그런데 특히 미국 흑인 사이에선 제가 흑인 치고는 피부색이 옅으니까 “흑인이니까 오케이고, 피부색도 옅으니 좋구나” 하는 반응이 좀 있어요. 음 성관계와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성관계가 쉽잖아요? 인간관계는 시간이 걸리고 서로 알아가는 것이 편하지만도 않은 것이니 친해지면 첨 것부터 하게 되요. 연애는 인간관계가 중요하죠. 가끔 보면 웃긴 소문도 있어요. 누구 누구는 물건이 크다.. 하는 소문들, 꼭 카리브나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에 대해서만 퍼지더라구요? 인종 기대적으로 퍼지는 것 아니겠어요.

    ㅋ양. 전 아주 보수적인 흑인 가족에서 살았서요. “왠만하면 흑인 남성과 사귀고, 정 다른 인종이라면 백인은 사귀지 마라” 하는 분위기에서. 그래서 일부러 인종에 제한을 두고 살았어요. 제가 남부 흑인 동네에 살아서 접촉 기회도 없었고. 대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배경에서 자란 이들을 만났는데, 내가 흑인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하 백인과 라티나를 사귀었으니 이제 흑인도 사귀어 보면 난 참 편견 없는 자유주의적인 백인이 되겠구나” 하는 입장 같은 것. 꼴같아서.. 지금 같이 사는 동거인은 백인인데 대학원 때 만났어요. 제가 피부 톤이 아주 어두워서 쉽게 “내가 백인으로서 흑인을 사귀니 참 특별하구나” 내지는 “이 흑인뇬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품기 쉬운데 그런 점이 없고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주는 이 사람.. 그렇게 알아가며 이끌리는 점이 있었지요. 아 그리고 이번 토론회에 대해서 말인데, 벽보에 써붙인 광고를 보니 참 사납게 광고를 했어요. 예를 들면 “코피 아난의 부인은 백인이래요!” 또는 “누구 누구 고추가 제일 클까?”둥둥.. 여기 주최한 너희들은 유일한 의도가 반응을 일으켜서 학생들을 오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 잘 알겠지만 학교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런 행사에 시간이 없던 있던 올수 없거든.. 그래서 그런 포스터 슬쩍 한 번 본것이 너희들 “다리” 단체에 대한 느낌을 만들어 버리는데 “누구 고추가 제일 클까”라니.. 여러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서 광고해야 하는 것 아니에욧! 버럭!~ 제가 대학원 다닐 시절에는 흑인연합이.. 다른 단체도 아닌 흑인학생연합이 모임을 열었는데, 세상에, 이름을 “KKK”라고 지었어요. 그래서 학교가 뒤집어지고.. 흑인학생 연합의 지도자들은 씩씩거리며 모임에 나타난 학생들에게 “어.. 그게 흑인 학생들 참여가 부족해서 이거 좀 고쳐볼려고 그랬다.. 오해 했다면 미안하다..” 그러는데 길 건너편에선 흑인 학생들이 영문도 모르고 항의 시위를.. 하여튼 튀는 것은 생각해보고 하시라는 말.

    ㅁ분. 저도 별별 오해를 다 받았어요. 인종 본질주의 및 오리엔탈리즘.. 말하자면 끝도 없어. 할아버지 쯤에 가면 이태리도 있는데, 마피아 같은 놈이라느니, 쿠바인이니 라틴 연인, 라티노 연인, 당신이 내 쿠바 독재자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스페인이면 또 탱고, 춤은 추냐, 등등. 쿠바인이지만 자라난 곳은 뉴욕시의 브룩스 동네인데 이곳이 아주 심한 게토이거든. 그래서 가끔 브룩스 사투리를 쓰면 사람들이 내가 흑인이냐고 묻고, 가끔 쿠바 동네 사투리를 쓰면 또 당황해하고, 날 상자에 집어넣으려고 안달들이야. 그리고 아무래도 게이 사회라는 것이 우리 유색인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소수가 되는 사회인데, 그런 곳에서 “난 백인이 아니다” (제 피부 톤이 아주 얕아서 쉽게 백인으로 오인되곤 하죠)라고 나서면 금새 다른 게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하여튼 유색인 게이로 사는 것은 (헤테로 주류) 유색인 공동체 쪽에서도 좋게 안 봐주고, (백인) 게이 쪽은 날 인종적으로 뚝 갈라 보니 불편해요. 나 같은 특수한 경험을 지닌 이들은 끼리 끼리 모이는 가봐요. 지금 사귀는 이가 하와이 원주민이니 말 다했지. 그런데 상대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오늘 사귀는 이와 같이 올려고 했는데, 그이가 약속이 있다면서 빠져버렸거든요. 그런데 그이도 이런 토론회를 자신 없어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야 우리 늘상 하는 이야기가 게이로서 인종소수자인 것에 대해 이야기 하잖아. 그냥 그 이야기 또 하면 되” 했더니 얘가 “우리가 언제 “늘” 인종 이야기 하냐..언제 했는데?” “어… 어.. 한번…” “한 번 말구, 또 언제” “음 그게 다네?” “것봐”. 웃긴것은 그도 자신의 대학에서 [직원임] 다문화 담당자이고, 나도 맥에서 기숙사 담당 및 다문화 담당을 하는데 우리 끼리 개인 적인 수준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참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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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에도 질문답이 오고갔는데 이게 지난 목요일이니 기억이 나야지 말이야. 음 주로 관계라는 것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받아들이고, 인종 같은 것으로 축소해서 관계 파탄내지 마라, 류의 충고가 압도적이었는데 이에 대해서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연애 관계를 순전히 인종적으로 축소해버리는 것이 테제 (thesis)이고 개인 대 개인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이에 대한 반 테제 (antithesis)라면 이를 극복하는 합성 (synthesis)가 있지 않을 까 하는 것인데.

    웃기게도 한국 남성들이 환장해 있는 남나라 여성에 깃발 꽃기와 맥락이 같다. 그러니까, 아시안 아메리칸 시인이 “나는 백인 여성과 섹스 할 때마다 미국이라는 국가에 박아 대는 착각을 한다”라는 요지의 시를 읅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라티나 여학생이 “어 나도 그래…”라고 해서 홀라당 놀랐다는. 그러니까 그가 사귀는 백인 남성이 있고, 우리 모두 그가 누군지 아는 상황인데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그리고 내년 결혼한다는데? -_-) 하여튼 여성 주의 초기의 슬로건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처럼, 지극히 개인 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연애 관계를 인종 정치적으로 들여다 볼수는 없는 것일까? 반항적 행위는 가능 할까 ? 등등의 물음. 토론회에서 차마 이 질문을 던지지 못한 것은 당사자들이 너무도 진진하게 “개인 관계라니까..” 를 강조해서. 토론회 끝나니 다들 자리를 뜸. 할 수 없이 아는 애들 붙잡고 “야 너 걔가 백인과의 섹스에 대해 했던 말 기억냐냐? 오늘 그거에 대해 물어보았더라면 어땠을까? 깔깔” 로 만족했다는

  • [번역] 언어로 채워 줄 수 있다면

    원문 보기

    이러한 저녁에 가슴이 뛰는 순간에
    꺼질 줄 모르는 열망 앞에 시야가 흐릴 때에
    네 곁에 있어서
    귓볼과 마음을 언어로 채워주며
    두려운 듯 흐르는 시냇물이 울리는 목소리로
    단어를 그리고 소리를 그리고 머나먼 음정을 노래 할 수 있다면.
    아침 일찍 부끄러움이라는 동굴에서 채석한
    젊은 입김과 빵 굽는 내음이 섞이는 아침마다
    흐느끼며 지하 감옥을 찾는 황혼마다.
    뜻 없는 단어들 사이로
    익숙한 인사법, 친근한 표현 사이로
    공허의 수호신이여, 숨차는 동(動)사를 허락 하시어
    새로운 시조와
    가만 가만 입이 고백하는 진실을 듣게 하소서.

    1999.09

  • 그러길래 피 억압자에게 목소리를 주면 안된다니깐

    좆선일보: 쑥대밭된 광주 부정 수능 취재기 를 보고..

    지종익 기자 양반, 참으로 꼴이 좋소이다. 광주에 가서 좆선일보 명함을 다고 고압적으로 취재를 해보려다가 곳곳에서 까버림을 당하니 참으로 기분이 좆선같지요?

    신근대주의자들이 경고를 해온지 이미 십오년이 지났건만 종익이는 주류적 담론의 기본 원칙을 망각해버렸소. 무릇 사람을 억압하려면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면 안된다 말이오!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 그것도 기자를 까는 목소리를 그대로 실어서 “잘 못한 학생이 감히 좆선 기자를 까니 황당하다”라고 우는 소리를 내니 망해도 참 폭삭 망했소.

    “누구야? 기자야? 짜증나. 말 하지 마. 저 개새끼들한테 말해서 뭐하게? 쟤들 말해줘 봤자 왜곡해서 쓰니까 이야기하지 마.” [기사 中]

    얼마나 열받았으면 이제는 아예 ㄱ 학생 또는 ㅇ 학생도 아니고 그냥 기사 중간에 찔러 넣었을까. 이해가 간다 해. “가담한 학생의 친구”로 배경은 참 잘 끼워 맞추려고 노랙해주셨소. 저 막말을 기자 앞에서 큰소리로 해준 학생의 대 매체 의식에 경의를. 종익이는 지금이라도 존 휘스케의 [대중문화] 2장: 상품 및 문화를 찾아보시오.

    “청소년은 종합 쇼핑몰에서 최상의 게릴라이다. … 돈은 없으나 시간은 남아도는 상황에서 그들은 상품만 빼놓고 공간과 시각결과물을 소비한다. 그들은 쇼핑몰이라는 공간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예를 들어 진열대 주위로 몰려들어 고객이 상품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음료수 캔에 맥주를 넣어 마시면서 주인의 신경을 건드려 보안요원을 부르게 만든다.” (휘스케, 1989: 38)

    기자로서 무시당하는 것에 열받아서 한 건 저질러 보려면 학생들의 반주류적인 말은 능력껏 왜곡해서 당신이 좋게 보이게 해야 제대로 여론 조작이 되지, 이렇게 치부를 드러내서야 냉소밖에 더 얻겠소? 흐흐. 당신은 지금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거요. 뭐냐 하니, 당신의 글 속에 이들이 말할 공간을 좆만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인용을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해서 이들이 하는 말의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의가 당신의 쪽팔림 및 노여움을 능가해 버린 것이요. 왠만하면 공간을 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요.

    왜 종익이 머리 속에서 얘내들을 인용해야 하는 압박감을 느꼈는지 안 봐도 삼천리구만.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기자에요?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든가!” [기사 中]

    그러게 말이요. 정작 당사자는 접근도 못하고 뻘뻘거렸소? 아무래도 가족의 눈총이 따가우니 뒷담 넘어 친구를 추궁했구만.

    이 글 올려준 스타라이트 님께도 참으로 감사한 말씀을 전해야 겠구만. 님의 공로가 아니면 어찌 내가 그 많은 매체의 겹겹이 해석성 기사를 뚫고 나온 이 고딩들의 직접인용을 들었겠소. 오마이도 그렇게 직선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았으리요

    후후, 개운해라. 광주 고등학생들 힘내시오.

    그리고 종익이, 조까시오.

    사진 출처: http://maddox.xmission.com (본 글과 상관 없음)
    Image source: http://maddox.xmission.com (image is unrelated to the article)

    2004년 12월 4일

    김용호

  • [번역]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번역 작업사이트: w.yokim.net/White_Nationalism_and_the_Multiracial_Left

    세상 크게 보기: 마이클 무어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한국어 번역]
    케년 훼로우, 길자 김

    Connecting the Dots: Michael Moore
    White Nationalism & the Multiracial Left [korean translation]
    by Kenyon Farrow and Kil Ja Kim
    nathanielturner.com/connectingthedots.htm

    2004년 6월 9일

    영상작가 및 평론가 마이클 무어가 [미국] 좌[익]의 깡패로 변하는 것에는 겨우 십년 밖에 걸리질 않았다. 혹자는 뉴욕타임즈지의 베스트셀러를 두권이나 출판하며 2003년 총기산업을 다뤄서 오스카 다큐 대상을 받고 금년 깐느 축제에서 부씨를 비판하는 화씨 9-11로 최고상을 받은 무어를 좌익에 포함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마이클이 “진보”, 또는 “급진”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디즈니사 CEO 마이클 아이스너가 화씨 9-11을 막아버린 이후 영화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다큐를 배포하겠다고 나선 데 있다. 결국 그가 주류 미디어계에 갈채를 받으며 (깐느에선 장장 이십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낌을 받는 깡패가 된 것은 그를 바라보는, 주류 정치담론에서 배제된 수많은 좌파인들에게서 홀대받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무어를 좌파정치와 연결해서 보는 것은 “좌익”이 의미하는 바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좌익 내부의 향방이 무어의 방법에 복선으로 깔려있는 상태를 문제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마이클 무어는 백인 국가주의자일뿐 이다. 그의 백인국가주의적 접근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생각하는 이들과 제도화된 좌익을 연결시키는 점이다.

    혹자는 “급격한” 단체들에게 허용되는 백인 국가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헷갈려하실수도 있겠다. 우리가 보기에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은 미국내 사회관계에서 이미 정상적인 것으로 전략한지 오래다. 백인들의 역사와 경험에 근거한 국가형성 계획이 우리가 말하는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이기 때문이지. 백인국가주의는 그저 백인중심의 사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백인 국가의 (이는 정부가 합의한 변경을 따르거나 사회상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일수도 있겠다) 지속 및 확장을 백인의 근심, 걱정, 공포 및 욕심등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백인국가주의 담론은 백인성과 미국시민사회,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시민권의 인종 계획화 및 성적계획화를 지나치곤 만다. 백인 국가주의적 접근의 첫 시발점은 “백인이 자신의 국가를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이다. 고로 백인국가주의 계획의 시선은 정부세력, 민중으로부터 발생하는 “반항성” 또는 세계 경제의 흐름중 어떤 면이 백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느냐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무어의 작품을 잘 살펴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는 주제가 백인 시민의 잃어버린 권리와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란 것을 알수 있다. 미시간주 플린트시의 자동차산업 대량해고나 무기산업, 2000년 대선 무효나 미국애국법 [USA PATRIOT Act]를 다루며 이들 문제가 유색인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무어는 이러한 문제가 문제 자체가 되는 이유를 백인 시민/노동자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멍청한 백인”의 개론중 무어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미국인들은 다 누군가가 우리의 밤샘 잔치의 전원을 뽑았다는 것을 안다. 미국의 세기는 다 갔다. 21세기 악몽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러한 “미국의 세기”가 끝났음으로 제시되는 이유들로 선거부정을 저지른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것, 일자리들이 [주로 전문직] 축소 및 해외수출되고 있다는 점, 주식 시장이 호황이 아니라는 점과 집 주인들이 융자금을 갚기가 어렵다는 점을 든다.

    이러한 백인 중산층류의 불평불만은 “친구야, 내 나라 어디로 가뿌렸나?” 에서도 확연하다. 제목만 보아도 백인 국가주의 이념에 핵심 역할을 하는 소유 및 권익 정서를 표현하지 않나? 9-11과 이라크 전쟁에 촛점을 두는 “친구야…”는 정경유착과 미국 시민/노동자의 낮아지는 임금/구매력에 대한 비판이자 국가의 “개혁 가능성” 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다.

    중산층이 집 구할때에 융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현실에 대해 불평하거나 2004년 대선에서 부시를 넘어뜨릴만한 이들을 선거장으로 끌어내는 일에 있어서 무어는 (노예가 아닌) 시민의 [여기서 “비노예 시민”은 백인을 가리킴] 공화국을 개혁할 능력에 대해 긍정적이다. 하나의 주장을 끝 매듭지으며 무어가 하는 소리를 보시라 “어떤 나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 그런 나라는 또 없습니다…. 아주, 아주, 자유개방적이고, 해방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는 이 나라… 이 빨갱이 낙원의 이름은 다름이 아닌 미대륙합중국 이라지요!” 무어의 이러한 긍정성은 자신의 인생 자체가 미국 비백인의 경험과는 다른 백인의 인식에서 근원하는 것 자체에서 백인중심적이지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백인우월주의적인 정부와 백인 시민성에 대한 베팅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무어는 결코 “미국 국가의 계획” [the American project] 상 “시민” 또는 “국가” 같은 개념들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어떻게 건축되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 발드윈 [James Baldwin]이 “백인공화국”으로 축약한 그것에 상기 개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지 프랑크 리흐 [Frank Rich]의 [그 또한 백인좌파엘리트이지만] 말을 빌리자면 무어는 “everyman” [소시민] 이다. (이 또한 인종차별주의 및 성차별주의적인 용어이며 백인 남성을 위해 거의 집중적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실제로 소시민 이든 아니든 그가 백인시민의 국가정부내의 접근권 및 포함됨을 급진적인 변화에 우선함은 확실하다.

    무어가 국가정부와 포함됨에 집착하는 것은 그가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미제국의 지배정책 등등의 미국계획을 실제로 의문시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무어에게 있어서 “실상의”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은 기업 견제, 공권력과 이를 지지하는 특정이권그룹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유한 백인남성 (또는 “멍청한 백인 남성”) – GM사의 회장 로저 B. 스미스, 록히드 마틴사의 관료 에반 막컬룸, NRA 활동가 차를턴 헤스턴, G.W 부시와 딕 체니 – 및 그들의 욕심에 피해를 보는 백인 중산 및 노동자 계급에 촛점을 맞출 뿐이다. 무어는 자본부의를 그 자체로서 억압적인, 특히 비백인 인구에게 그러한 체제로서 비판하지 않고 그 대신 부유한 백인남성들이 그렇게 욕심쟁이이지 않기만 하다면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분석한다. “멍청한 백인 남성” 논지의 전제는 결국 자신의 동포인 중산층 및 노동계급 백인들과 소유를 공유하며 그들 또한 미국 계획의 산물을 누리도록 해야 하는다는 것인 것이다.

    무어식의 부패한 개인들을 문제화 하며 동시에 부패한 제도를 (기업 또는 정부 등의 구조에 의해서 현실화되는) 문제화 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백지수표를 내주는 것과 다름없을뿐만아니라 내부 차이에도 불과하고 백인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협력해서 백인우월주의와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을 통해 모든 형태의 억압을 지탱하는 현상을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거한 그들의 백인우월주의 및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은 동시에 그들의 반흑인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에 대한 투자를 나타낸다.

    1787년 헌법 모임의 토론에 나타났듯이 미국에서의 시민권이란 개념은 원래부터 노예화된 인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시민” 또는 “자유로운” 사람은 특정인종과 성의 테투리 내부에서 시민사회에 참여할수 있었다. 이 구조는 반개념 [antithesis]인 노예의 개념에서도 적용된다. 여러 사회 그룹이 노예 제도 또는 토지에 포함된 하인 생활에 얽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만이 평생 노예로, 다시 말하자?자유와 공(共)화국의 [re/public] 참여에 합당하지 않는 인종으로 이해되었다. 합법적 노예제도 시대 동안도 몇몇 안되는 “자유로운” 흑인들은 끊임없이 노예로 복귀시키겠다는 협박 및 폭력 그리고 실상 및 실법 차별아래 있었다.

    오늘날 미국이란 계획이 여러 인구들을 섭렵하면서 백인 공(共)화국을 다인종 공화국으로 만든 이후에도 흑인성은 시민성 또는 “흡수될 만한것”의 경계선 바깥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하여 시민성의 사유의 주체의 반개념으로 작동한다. 비흑인 유색인종의 시민권이 원래 희미하며 결코 백인시민권의 위치에 필적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도 흑인성은 반-시민으로 작용하여 다인종 미국계획에 뚜렷한 경계선을 제시한다.

    무어식대로 시민권과 민주주의에 투자를 하자면 죠이 제임스가 [Joy James] 지적한 것 처럼 미국 사회만큼 철저히 인종세분화된 사회에서 “범죄성, 반사회성, 부도덕성 그리고 부패가 흑인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현상”을 문제화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무어가 이런 방식의 분석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백인 군인의 가족원을 인터뷰 할 때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왜 그들이 총에 집착하는 지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그들이 왜 자신을 “범죄자” 또는 “침입자”들을 상대로 보호해야 한다며 무장해야 하는 지 설명할때 무어는 그 “범죄자”는 분위기상 흑인을 가리치는 것임을 문제화 하지 않는다.

    이렇게 잘 조직된 반정부 군단체들이 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왜 젊은 표범당 [Black Panther Party]나 미 원주민 운동 [American Indian Movement (AIM)] 같은, 호전적인 백인정부와 시민사회를 향해 무력해방시도를 주도한 단체들은 FBI 첩보원, COINTELPRO 등의, 흑인 및 미원주민 공동체를 분쇄하려는 수많은 조직들에 의해서 구조적 및 폭력적으로 해체당하면서도 무어는 그러한 파괴를 주도한 정부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비판을 가하는가?

    다시 설명해보자. 무어가 자신을 포함시키는, 그리고 좋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백인시민대중은 동시에 흑인 및 원주민을 억누르는 백인국가정부의 보호를 받는다. 억압의 형태는 대게 급진주의를 제거하거나, 공공교육예산을 감축하거나 게토와 가난한 농지에 여러 종류의 구조조정 정책을 감행하거나 가난 및 중독을 범죄화 하거나 (그러면서도 마약 거래는 조장하고!), 공공 주거지역 및 원주민 구역 그리고 경찰력을 통한 억압 및 대규모 감옥화등을 지닌다.

    우리들이 무어가 반흑인 계획을 추진한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불공평하다고 할지도 모르겠군. 그의 저서와 영화속에서 무어는 노예 제도, 인종검문 및 감옥화등을 다루지 않던가? 라고. 물론 그러하긴 하지만, 무어는 그러한 비판이 그의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흐트리지 않는 수위에서만 문제제기를 할 뿐이며 오히려 그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인종차별적인]상황이 전제되어야만 대중이 지지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백인 시민/노동자/반기업 주체가 존재할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종종 무어는 이러한 패러다임에 들어맞는 비백인들에게 그의 지지를 보내는데 바로 이러한 “너그러움”이 있을 수 있다는 상황 자체가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의 협력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백인국가주의와 다인종 공/화국에 대한 지지와 공존 하는 예시로 “친구야…” 에서 9-11후 중동 및 남아시아 발 이민남성의 이유 없는 수색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국가 보안의 비호 아래 비백인을 도매로 잡아들이는 것은 백인우월주위라는 점에 대해 동의 할수는 있지만 우리는 무어가 이민자들을 변호하는 방식을 문제화 한다: “많은 사람들을, 그들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 할 만한 이유도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비-미국적이다 [un-american]”. [번역 주: 비미국적이라는 단어는 9-11 후 이민자들과 외국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을 국내 정책 담론에서 소외시키기 위한 부시의 매체 전략이었음] 이 선언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람을 특정 이유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매우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투옥율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것을 생각하자면 말이지.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무어가 비백인 이민자들의 투옥 및 추방을 문제화 할 때 그 논리에 깔려있는 전제는 “범죄적” 인체는 “위험하고” 그로서 그들은 투옥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노예 제도가 끝난 후 미국의 흑인들이 다른 인종 그룹과 비교 할 때 압도적인 비율로 투옥된 점, 그리고 “자유 서방”에서 흑인성은 경찰이 훈련을 받을 때 범죄자의 기본 형태로서 제시된 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무어가 이민자들의 불공정한 투옥에 대한 가하는 비판은 이들 이민자들이 “진짜 범죄자” (말하자면 흑인) 가 아니면서도 범죄자인 마냥 다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읽을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흑인의 위치성을 사회 구조의 필요조건으로 읽는 대신 이를 가져와 결백에 대한 이야기를 풀려 쓰는 것이다.

    무어와 그가 지지하는 다인종 좌익 사이에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이들은 공유하는 점 또한 지니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멍청한 백인 남성”을 비판하는 진보 운동은 흑인성에 대한 공포에서 그 원천을 찾는 다고 할수 있으리라. 쉽게 말하자면 흑인에 대해 관심은 없고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수 있다.

    미국의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자. 이는 다인종적인 노동조합, 이민 권익, 반 노동착취 [anti-sweatshop] 반기업 그리고 반 감옥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크 윌더슨은 [Frank Wilderson] “반 세계화 운동의 민주적 포퓰리즘은 이념 및 물질적으로 반흑인성으로 묶여있는데 이 반흑인성은 말하지 않고서도 이해되는, 그러면서도 필수적이며 광범위한 성질을 지닌다.. 반세계화 운동이 흑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이들이 난민일 경우 일 뿐인데 이 경우 그들은 다른 이의 사업에 무단침입한 것 뿐이다”라고 적절하게 기술한다.

    윌더슨에 의하면 반 세계화 운동에게 “가능성의 전제”로서 흑인의 죽음은 잭슨 민주주의에 [Jacksonian]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 이는 19세기의 전통으로서 “소시민” 백인 남성에게 백인 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시민사회와 시민 권리를 더 넓히려는 목적을 지녔다. 이 시도는 미국긍정이면서 반지배세력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반흑인성을 띄었는데, “소시민”의 권리창출과 자기 교육은 노예 제도 또는 노예화 된 비합리적인 대상의 존재 하에서만 형태를 갖출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잭슨 민주주의파 처럼 무어 또한 사회가 흑인의 위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에 의지해 지배 세력가 투쟁하는 것 처럼 보이는 “소시민”의 권리를 지지할 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허나 윌더슨이 지적하듯이 “오늘날의 반 세계화 운동과는 달리 잭슨파는 내놓고 그들의 백인 우월주의를 천명하였다.” 흑인의 죽음은 사회 기회와 사회 움직임의 가능성에 구체적 형태를 주는데 오늘날 다인종 정치의 세기에, 시민권 및 민주주의에 집중하는 백인은 흑인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멍청한 백인 남성들” 또는 “권력을 잡은 백인들” (이런 표현은 사실 필요하지 않는데도) 을 조롱하고 못박으면서 백인국가주의로 낙인찍히는 것을 면하고 동시에 소수의 유색인들에 (무어의 경우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 대한 지지를 표현할 수 있다.

    무어와 수 많은 좌익 운동은 공유하는 점이 크다. 오늘날 공(共)화국의 다인종 본질을 고려할 때 살아있는 제도화된 진보운동 중 명백하게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그러나 미국 계획이 흑인의 억압 및 죽음의 구조화 인것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진보 운동은 “멍청한 백인 남성”을 후리는 것에 있어서 무어와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

    오늘날의 다인종 진보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는 아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한편으로 미국 시민사회를 접근하기 위한 시도이며 반면으로는 흑인성의 저지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두렴움을 표현한다. 이런 성향은 대중의 시민권 접근성 및 시민/개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을 통해 확인할수 있다. 모든 좌익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무어의 계획과, 또한 19세기 잭슨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단순히 말해 반흑인 인종차별이다. 윌더슨은 이 문제에 대해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 “모든 반공적 정치 흐름이 백인 긍정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항상 반 흑인주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간단하게 말해, 다인종이던 아니던 어떠한 정치적 성향의 운동이라도 근본적으로는 미국 계획상의 흑인 위치성을 문제화 함으로서 급진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대신 그 흑인 위치성에 의지해 정치세력화를 꽤하며 시민권, 민주주의 그리고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운동가들에게 놓인 과제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어떤 방법으로 무어 성향의 반흑인 인종차별 및 성차별 그리고 백인 국가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을 피하는 가 하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흑인의 생물 및 사회상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고 시급한 이슈를 위한 지지/자금을 구할 것인가? 백인 국가주의 속성상, 비흑인들은 어떻게 하면 흑인 범죄수의 상(狀)을 자신의 안티테제로 제시하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며 결백을 증명할 것인가? 흑인의 사회적 위치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를 흔드는 과정으로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문제화 할수 있는가? 그러한 시도는 어떠한 형태 또는 담론을 지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국가주의/다인종 정치의 시대에 “좌익”으로 이해되어지고 씌여지는/출판되는/소비되고 제도화되는 정치 언어, 정체성, 운동에 대한 신념과 염원의 재 구조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과제일수 가 없다. 그러한 재구조화를 위해서는 이미 정착된 담론과 제도화된, 진보적으로, 급진 또는 혁명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정치 형태를 문제화해야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은 마이클 무어등의 정치계획을 포함하는 제도화된 좌익 담론을 비판적으로 상대하며 때가 되면 그 테투리를 넘어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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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년 훼로우 [Kenyon Farrow]는 뉴 올리언스 [New Orleans]에서 활동하는 필자, 운동가 및 연출가이며 길자 김 [Kil Ja Kim]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활동하는 연구자, 교육가 및 운동가입니다.

    원 저자 연락처:
    Kenyon Farrow kenyonfarrow@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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