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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길래 피 억압자에게 목소리를 주면 안된다니깐

    좆선일보: 쑥대밭된 광주 부정 수능 취재기 를 보고..

    지종익 기자 양반, 참으로 꼴이 좋소이다. 광주에 가서 좆선일보 명함을 다고 고압적으로 취재를 해보려다가 곳곳에서 까버림을 당하니 참으로 기분이 좆선같지요?

    신근대주의자들이 경고를 해온지 이미 십오년이 지났건만 종익이는 주류적 담론의 기본 원칙을 망각해버렸소. 무릇 사람을 억압하려면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면 안된다 말이오!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 그것도 기자를 까는 목소리를 그대로 실어서 “잘 못한 학생이 감히 좆선 기자를 까니 황당하다”라고 우는 소리를 내니 망해도 참 폭삭 망했소.

    “누구야? 기자야? 짜증나. 말 하지 마. 저 개새끼들한테 말해서 뭐하게? 쟤들 말해줘 봤자 왜곡해서 쓰니까 이야기하지 마.” [기사 中]

    얼마나 열받았으면 이제는 아예 ㄱ 학생 또는 ㅇ 학생도 아니고 그냥 기사 중간에 찔러 넣었을까. 이해가 간다 해. “가담한 학생의 친구”로 배경은 참 잘 끼워 맞추려고 노랙해주셨소. 저 막말을 기자 앞에서 큰소리로 해준 학생의 대 매체 의식에 경의를. 종익이는 지금이라도 존 휘스케의 [대중문화] 2장: 상품 및 문화를 찾아보시오.

    “청소년은 종합 쇼핑몰에서 최상의 게릴라이다. … 돈은 없으나 시간은 남아도는 상황에서 그들은 상품만 빼놓고 공간과 시각결과물을 소비한다. 그들은 쇼핑몰이라는 공간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예를 들어 진열대 주위로 몰려들어 고객이 상품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음료수 캔에 맥주를 넣어 마시면서 주인의 신경을 건드려 보안요원을 부르게 만든다.” (휘스케, 1989: 38)

    기자로서 무시당하는 것에 열받아서 한 건 저질러 보려면 학생들의 반주류적인 말은 능력껏 왜곡해서 당신이 좋게 보이게 해야 제대로 여론 조작이 되지, 이렇게 치부를 드러내서야 냉소밖에 더 얻겠소? 흐흐. 당신은 지금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거요. 뭐냐 하니, 당신의 글 속에 이들이 말할 공간을 좆만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인용을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해서 이들이 하는 말의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의가 당신의 쪽팔림 및 노여움을 능가해 버린 것이요. 왠만하면 공간을 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요.

    왜 종익이 머리 속에서 얘내들을 인용해야 하는 압박감을 느꼈는지 안 봐도 삼천리구만.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기자에요?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든가!” [기사 中]

    그러게 말이요. 정작 당사자는 접근도 못하고 뻘뻘거렸소? 아무래도 가족의 눈총이 따가우니 뒷담 넘어 친구를 추궁했구만.

    이 글 올려준 스타라이트 님께도 참으로 감사한 말씀을 전해야 겠구만. 님의 공로가 아니면 어찌 내가 그 많은 매체의 겹겹이 해석성 기사를 뚫고 나온 이 고딩들의 직접인용을 들었겠소. 오마이도 그렇게 직선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았으리요

    후후, 개운해라. 광주 고등학생들 힘내시오.

    그리고 종익이, 조까시오.

    사진 출처: http://maddox.xmission.com (본 글과 상관 없음)
    Image source: http://maddox.xmission.com (image is unrelated to the article)

    2004년 12월 4일

    김용호

  • [번역]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번역 작업사이트: w.yokim.net/White_Nationalism_and_the_Multiracial_Left

    세상 크게 보기: 마이클 무어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 [한국어 번역]
    케년 훼로우, 길자 김

    Connecting the Dots: Michael Moore
    White Nationalism & the Multiracial Left [korean translation]
    by Kenyon Farrow and Kil Ja Kim
    nathanielturner.com/connectingthedots.htm

    2004년 6월 9일

    영상작가 및 평론가 마이클 무어가 [미국] 좌[익]의 깡패로 변하는 것에는 겨우 십년 밖에 걸리질 않았다. 혹자는 뉴욕타임즈지의 베스트셀러를 두권이나 출판하며 2003년 총기산업을 다뤄서 오스카 다큐 대상을 받고 금년 깐느 축제에서 부씨를 비판하는 화씨 9-11로 최고상을 받은 무어를 좌익에 포함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마이클이 “진보”, 또는 “급진”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디즈니사 CEO 마이클 아이스너가 화씨 9-11을 막아버린 이후 영화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다큐를 배포하겠다고 나선 데 있다. 결국 그가 주류 미디어계에 갈채를 받으며 (깐느에선 장장 이십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낌을 받는 깡패가 된 것은 그를 바라보는, 주류 정치담론에서 배제된 수많은 좌파인들에게서 홀대받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무어를 좌파정치와 연결해서 보는 것은 “좌익”이 의미하는 바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좌익 내부의 향방이 무어의 방법에 복선으로 깔려있는 상태를 문제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마이클 무어는 백인 국가주의자일뿐 이다. 그의 백인국가주의적 접근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생각하는 이들과 제도화된 좌익을 연결시키는 점이다.

    혹자는 “급격한” 단체들에게 허용되는 백인 국가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헷갈려하실수도 있겠다. 우리가 보기에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은 미국내 사회관계에서 이미 정상적인 것으로 전략한지 오래다. 백인들의 역사와 경험에 근거한 국가형성 계획이 우리가 말하는 백인국가주의라는 것이기 때문이지. 백인국가주의는 그저 백인중심의 사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백인 국가의 (이는 정부가 합의한 변경을 따르거나 사회상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일수도 있겠다) 지속 및 확장을 백인의 근심, 걱정, 공포 및 욕심등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백인국가주의 담론은 백인성과 미국시민사회,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시민권의 인종 계획화 및 성적계획화를 지나치곤 만다. 백인 국가주의적 접근의 첫 시발점은 “백인이 자신의 국가를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이다. 고로 백인국가주의 계획의 시선은 정부세력, 민중으로부터 발생하는 “반항성” 또는 세계 경제의 흐름중 어떤 면이 백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느냐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무어의 작품을 잘 살펴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는 주제가 백인 시민의 잃어버린 권리와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란 것을 알수 있다. 미시간주 플린트시의 자동차산업 대량해고나 무기산업, 2000년 대선 무효나 미국애국법 [USA PATRIOT Act]를 다루며 이들 문제가 유색인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무어는 이러한 문제가 문제 자체가 되는 이유를 백인 시민/노동자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멍청한 백인”의 개론중 무어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미국인들은 다 누군가가 우리의 밤샘 잔치의 전원을 뽑았다는 것을 안다. 미국의 세기는 다 갔다. 21세기 악몽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러한 “미국의 세기”가 끝났음으로 제시되는 이유들로 선거부정을 저지른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것, 일자리들이 [주로 전문직] 축소 및 해외수출되고 있다는 점, 주식 시장이 호황이 아니라는 점과 집 주인들이 융자금을 갚기가 어렵다는 점을 든다.

    이러한 백인 중산층류의 불평불만은 “친구야, 내 나라 어디로 가뿌렸나?” 에서도 확연하다. 제목만 보아도 백인 국가주의 이념에 핵심 역할을 하는 소유 및 권익 정서를 표현하지 않나? 9-11과 이라크 전쟁에 촛점을 두는 “친구야…”는 정경유착과 미국 시민/노동자의 낮아지는 임금/구매력에 대한 비판이자 국가의 “개혁 가능성” 에 대한 희망의 표현이다.

    중산층이 집 구할때에 융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현실에 대해 불평하거나 2004년 대선에서 부시를 넘어뜨릴만한 이들을 선거장으로 끌어내는 일에 있어서 무어는 (노예가 아닌) 시민의 [여기서 “비노예 시민”은 백인을 가리킴] 공화국을 개혁할 능력에 대해 긍정적이다. 하나의 주장을 끝 매듭지으며 무어가 하는 소리를 보시라 “어떤 나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 그런 나라는 또 없습니다…. 아주, 아주, 자유개방적이고, 해방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는 이 나라… 이 빨갱이 낙원의 이름은 다름이 아닌 미대륙합중국 이라지요!” 무어의 이러한 긍정성은 자신의 인생 자체가 미국 비백인의 경험과는 다른 백인의 인식에서 근원하는 것 자체에서 백인중심적이지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백인우월주의적인 정부와 백인 시민성에 대한 베팅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무어는 결코 “미국 국가의 계획” [the American project] 상 “시민” 또는 “국가” 같은 개념들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어떻게 건축되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 발드윈 [James Baldwin]이 “백인공화국”으로 축약한 그것에 상기 개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지 프랑크 리흐 [Frank Rich]의 [그 또한 백인좌파엘리트이지만] 말을 빌리자면 무어는 “everyman” [소시민] 이다. (이 또한 인종차별주의 및 성차별주의적인 용어이며 백인 남성을 위해 거의 집중적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실제로 소시민 이든 아니든 그가 백인시민의 국가정부내의 접근권 및 포함됨을 급진적인 변화에 우선함은 확실하다.

    무어가 국가정부와 포함됨에 집착하는 것은 그가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미제국의 지배정책 등등의 미국계획을 실제로 의문시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무어에게 있어서 “실상의”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은 기업 견제, 공권력과 이를 지지하는 특정이권그룹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부유한 백인남성 (또는 “멍청한 백인 남성”) – GM사의 회장 로저 B. 스미스, 록히드 마틴사의 관료 에반 막컬룸, NRA 활동가 차를턴 헤스턴, G.W 부시와 딕 체니 – 및 그들의 욕심에 피해를 보는 백인 중산 및 노동자 계급에 촛점을 맞출 뿐이다. 무어는 자본부의를 그 자체로서 억압적인, 특히 비백인 인구에게 그러한 체제로서 비판하지 않고 그 대신 부유한 백인남성들이 그렇게 욕심쟁이이지 않기만 하다면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분석한다. “멍청한 백인 남성” 논지의 전제는 결국 자신의 동포인 중산층 및 노동계급 백인들과 소유를 공유하며 그들 또한 미국 계획의 산물을 누리도록 해야 하는다는 것인 것이다.

    무어식의 부패한 개인들을 문제화 하며 동시에 부패한 제도를 (기업 또는 정부 등의 구조에 의해서 현실화되는) 문제화 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백지수표를 내주는 것과 다름없을뿐만아니라 내부 차이에도 불과하고 백인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협력해서 백인우월주의와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을 통해 모든 형태의 억압을 지탱하는 현상을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거한 그들의 백인우월주의 및 백인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은 동시에 그들의 반흑인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에 대한 투자를 나타낸다.

    1787년 헌법 모임의 토론에 나타났듯이 미국에서의 시민권이란 개념은 원래부터 노예화된 인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시민” 또는 “자유로운” 사람은 특정인종과 성의 테투리 내부에서 시민사회에 참여할수 있었다. 이 구조는 반개념 [antithesis]인 노예의 개념에서도 적용된다. 여러 사회 그룹이 노예 제도 또는 토지에 포함된 하인 생활에 얽매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만이 평생 노예로, 다시 말하자?자유와 공(共)화국의 [re/public] 참여에 합당하지 않는 인종으로 이해되었다. 합법적 노예제도 시대 동안도 몇몇 안되는 “자유로운” 흑인들은 끊임없이 노예로 복귀시키겠다는 협박 및 폭력 그리고 실상 및 실법 차별아래 있었다.

    오늘날 미국이란 계획이 여러 인구들을 섭렵하면서 백인 공(共)화국을 다인종 공화국으로 만든 이후에도 흑인성은 시민성 또는 “흡수될 만한것”의 경계선 바깥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하여 시민성의 사유의 주체의 반개념으로 작동한다. 비흑인 유색인종의 시민권이 원래 희미하며 결코 백인시민권의 위치에 필적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도 흑인성은 반-시민으로 작용하여 다인종 미국계획에 뚜렷한 경계선을 제시한다.

    무어식대로 시민권과 민주주의에 투자를 하자면 죠이 제임스가 [Joy James] 지적한 것 처럼 미국 사회만큼 철저히 인종세분화된 사회에서 “범죄성, 반사회성, 부도덕성 그리고 부패가 흑인의 몸에 각인되어 있는 현상”을 문제화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무어가 이런 방식의 분석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백인 군인의 가족원을 인터뷰 할 때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왜 그들이 총에 집착하는 지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긴 하지만 그들이 왜 자신을 “범죄자” 또는 “침입자”들을 상대로 보호해야 한다며 무장해야 하는 지 설명할때 무어는 그 “범죄자”는 분위기상 흑인을 가리치는 것임을 문제화 하지 않는다.

    이렇게 잘 조직된 반정부 군단체들이 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왜 젊은 표범당 [Black Panther Party]나 미 원주민 운동 [American Indian Movement (AIM)] 같은, 호전적인 백인정부와 시민사회를 향해 무력해방시도를 주도한 단체들은 FBI 첩보원, COINTELPRO 등의, 흑인 및 미원주민 공동체를 분쇄하려는 수많은 조직들에 의해서 구조적 및 폭력적으로 해체당하면서도 무어는 그러한 파괴를 주도한 정부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비판을 가하는가?

    다시 설명해보자. 무어가 자신을 포함시키는, 그리고 좋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백인시민대중은 동시에 흑인 및 원주민을 억누르는 백인국가정부의 보호를 받는다. 억압의 형태는 대게 급진주의를 제거하거나, 공공교육예산을 감축하거나 게토와 가난한 농지에 여러 종류의 구조조정 정책을 감행하거나 가난 및 중독을 범죄화 하거나 (그러면서도 마약 거래는 조장하고!), 공공 주거지역 및 원주민 구역 그리고 경찰력을 통한 억압 및 대규모 감옥화등을 지닌다.

    우리들이 무어가 반흑인 계획을 추진한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불공평하다고 할지도 모르겠군. 그의 저서와 영화속에서 무어는 노예 제도, 인종검문 및 감옥화등을 다루지 않던가? 라고. 물론 그러하긴 하지만, 무어는 그러한 비판이 그의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흐트리지 않는 수위에서만 문제제기를 할 뿐이며 오히려 그의 계획에서는 이러한 [인종차별적인]상황이 전제되어야만 대중이 지지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백인 시민/노동자/반기업 주체가 존재할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종종 무어는 이러한 패러다임에 들어맞는 비백인들에게 그의 지지를 보내는데 바로 이러한 “너그러움”이 있을 수 있다는 상황 자체가 백인 국가주의와 다인종 좌익의 협력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백인국가주의와 다인종 공/화국에 대한 지지와 공존 하는 예시로 “친구야…” 에서 9-11후 중동 및 남아시아 발 이민남성의 이유 없는 수색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국가 보안의 비호 아래 비백인을 도매로 잡아들이는 것은 백인우월주위라는 점에 대해 동의 할수는 있지만 우리는 무어가 이민자들을 변호하는 방식을 문제화 한다: “많은 사람들을, 그들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 할 만한 이유도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비-미국적이다 [un-american]”. [번역 주: 비미국적이라는 단어는 9-11 후 이민자들과 외국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을 국내 정책 담론에서 소외시키기 위한 부시의 매체 전략이었음] 이 선언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람을 특정 이유 없이 잡아들이는 것은 매우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투옥율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것을 생각하자면 말이지.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무어가 비백인 이민자들의 투옥 및 추방을 문제화 할 때 그 논리에 깔려있는 전제는 “범죄적” 인체는 “위험하고” 그로서 그들은 투옥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노예 제도가 끝난 후 미국의 흑인들이 다른 인종 그룹과 비교 할 때 압도적인 비율로 투옥된 점, 그리고 “자유 서방”에서 흑인성은 경찰이 훈련을 받을 때 범죄자의 기본 형태로서 제시된 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무어가 이민자들의 불공정한 투옥에 대한 가하는 비판은 이들 이민자들이 “진짜 범죄자” (말하자면 흑인) 가 아니면서도 범죄자인 마냥 다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읽을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흑인의 위치성을 사회 구조의 필요조건으로 읽는 대신 이를 가져와 결백에 대한 이야기를 풀려 쓰는 것이다.

    무어와 그가 지지하는 다인종 좌익 사이에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이들은 공유하는 점 또한 지니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멍청한 백인 남성”을 비판하는 진보 운동은 흑인성에 대한 공포에서 그 원천을 찾는 다고 할수 있으리라. 쉽게 말하자면 흑인에 대해 관심은 없고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수 있다.

    미국의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자. 이는 다인종적인 노동조합, 이민 권익, 반 노동착취 [anti-sweatshop] 반기업 그리고 반 감옥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크 윌더슨은 [Frank Wilderson] “반 세계화 운동의 민주적 포퓰리즘은 이념 및 물질적으로 반흑인성으로 묶여있는데 이 반흑인성은 말하지 않고서도 이해되는, 그러면서도 필수적이며 광범위한 성질을 지닌다.. 반세계화 운동이 흑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이들이 난민일 경우 일 뿐인데 이 경우 그들은 다른 이의 사업에 무단침입한 것 뿐이다”라고 적절하게 기술한다.

    윌더슨에 의하면 반 세계화 운동에게 “가능성의 전제”로서 흑인의 죽음은 잭슨 민주주의에 [Jacksonian]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 이는 19세기의 전통으로서 “소시민” 백인 남성에게 백인 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시민사회와 시민 권리를 더 넓히려는 목적을 지녔다. 이 시도는 미국긍정이면서 반지배세력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반흑인성을 띄었는데, “소시민”의 권리창출과 자기 교육은 노예 제도 또는 노예화 된 비합리적인 대상의 존재 하에서만 형태를 갖출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잭슨 민주주의파 처럼 무어 또한 사회가 흑인의 위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에 의지해 지배 세력가 투쟁하는 것 처럼 보이는 “소시민”의 권리를 지지할 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허나 윌더슨이 지적하듯이 “오늘날의 반 세계화 운동과는 달리 잭슨파는 내놓고 그들의 백인 우월주의를 천명하였다.” 흑인의 죽음은 사회 기회와 사회 움직임의 가능성에 구체적 형태를 주는데 오늘날 다인종 정치의 세기에, 시민권 및 민주주의에 집중하는 백인은 흑인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멍청한 백인 남성들” 또는 “권력을 잡은 백인들” (이런 표현은 사실 필요하지 않는데도) 을 조롱하고 못박으면서 백인국가주의로 낙인찍히는 것을 면하고 동시에 소수의 유색인들에 (무어의 경우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 대한 지지를 표현할 수 있다.

    무어와 수 많은 좌익 운동은 공유하는 점이 크다. 오늘날 공(共)화국의 다인종 본질을 고려할 때 살아있는 제도화된 진보운동 중 명백하게 백인국가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그러나 미국 계획이 흑인의 억압 및 죽음의 구조화 인것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진보 운동은 “멍청한 백인 남성”을 후리는 것에 있어서 무어와 비슷한 방법을 취한다.

    오늘날의 다인종 진보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는 아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한편으로 미국 시민사회를 접근하기 위한 시도이며 반면으로는 흑인성의 저지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두렴움을 표현한다. 이런 성향은 대중의 시민권 접근성 및 시민/개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을 통해 확인할수 있다. 모든 좌익 운동이 백인 국가주의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무어의 계획과, 또한 19세기 잭슨 민주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단순히 말해 반흑인 인종차별이다. 윌더슨은 이 문제에 대해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 “모든 반공적 정치 흐름이 백인 긍정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항상 반 흑인주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간단하게 말해, 다인종이던 아니던 어떠한 정치적 성향의 운동이라도 근본적으로는 미국 계획상의 흑인 위치성을 문제화 함으로서 급진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대신 그 흑인 위치성에 의지해 정치세력화를 꽤하며 시민권, 민주주의 그리고 권리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운동가들에게 놓인 과제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어떤 방법으로 무어 성향의 반흑인 인종차별 및 성차별 그리고 백인 국가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을 피하는 가 하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흑인의 생물 및 사회상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고 시급한 이슈를 위한 지지/자금을 구할 것인가? 백인 국가주의 속성상, 비흑인들은 어떻게 하면 흑인 범죄수의 상(狀)을 자신의 안티테제로 제시하지 않고 정의를 요구하며 결백을 증명할 것인가? 흑인의 사회적 위치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치를 흔드는 과정으로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문제화 할수 있는가? 그러한 시도는 어떠한 형태 또는 담론을 지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국가주의/다인종 정치의 시대에 “좌익”으로 이해되어지고 씌여지는/출판되는/소비되고 제도화되는 정치 언어, 정체성, 운동에 대한 신념과 염원의 재 구조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과제일수 가 없다. 그러한 재구조화를 위해서는 이미 정착된 담론과 제도화된, 진보적으로, 급진 또는 혁명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정치 형태를 문제화해야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일은 마이클 무어등의 정치계획을 포함하는 제도화된 좌익 담론을 비판적으로 상대하며 때가 되면 그 테투리를 넘어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 * *

    케년 훼로우 [Kenyon Farrow]는 뉴 올리언스 [New Orleans]에서 활동하는 필자, 운동가 및 연출가이며 길자 김 [Kil Ja Kim]은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활동하는 연구자, 교육가 및 운동가입니다.

    원 저자 연락처:
    Kenyon Farrow kenyonfarrow@hotmail.com
    Kil Ja Kim kiljakim2003@yahoo.com

  • 겨울 방학 되면 쓰고 싶은 글…

    겨울 방학이 2주면 다가오면서도 영원처럼 느껴지다니…

    번역하고픈 글:
    제니퍼 [로페즈]의 엉덩이
    Frances Negrón-Muntaner. Jennifer’s butt. Aztlan 22 (1997): 181-194

    누구의 스페인어이고 누구의 언어이며 누구의 권력인가? 차별된 이중언어에 대한 민족지적 질문
    Frances Aparicio, “Whose Spanish, Whose Language, Whose Power?: An Ethnographic Inquiry into Differential Bilingualism,” Indiana Journal of Hispanic Literatures

    엘비스는 그런 일을 처리하곤 있어: 치카노 대중 음악의 국제/내 영향 <– 상기 사진을 보시라
    Michelle Habell-Pallan. El Vez is "taking care of business": the inter/national appeal of chicano popular music. Cultural Studies 13(2) 1999, 195-210

    1921년 인디언 미인대회와 멕시코 국가문화의 민족화
    Rick A. López. “The India Bonita Contest of 1921 and the Ethnicization of Mexican National Culture”, Hispanic American Historical Review, no. 82, vol. 2 (2002): 291-328

    닥치게 하는 힘: 후기아파르타이드 남아공의 사회 지형
    Kate Crehan. Silencing Power: Mapping the Social Terrain in Post-Apartheid South Africa In Contested Terrains and Constructed Territories: Contemporary Africa in Focus. (2002) pp. 173-193.

    가나 관광사업
    Edward M. Bruner. (1996)Tourism in Ghana: The Representation of Slavery and the Return of the Black Diaspora. American Anthropologist 98(2): 290-304
    해석 같은 것 올리고 싶음..

    검은 소음: 현대 미국의 랩 음악과 흑인 문화
    Tricia Rose. Black Noise: Rap Music and Black Culture in Contemporary America (1994)
    쓰고 싶은 주제: 전략적 정체성, 언어 힘의 관계, 관계의 지리, 학생 운동 내의 인종역학, 기독교와 LGBT, 인류학 내부의 대 포모학파 암투, 이중언어와 젠더, 여성본질주의와 메일링 리스트, 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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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
    http://www.mediamob.co.kr/zodiac/23822.html
    http://www.mediamob.co.kr/zodiac/post/tb.asp?PKId=23822

    수 이야기로 시작해 봅니다
    http://www.mediamob.co.kr/yoomyungah/22340.html
    http://www.mediamob.co.kr/yoomyungah/post/tb.asp?PKId=22340

    작게 꺼끌대는 뱃속의 알갱이
    http://www.mediamob.co.kr/cheezelol/95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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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
    http://www.mediamob.co.kr/cheezelol/193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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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측정의 문제
    http://www.mediamob.co.kr/rockdipl/13419.html
    http://www.mediamob.co.kr/rockdipl/post/tb.asp?PKId=13419

    민족, 민족주의, 그리고 약자들의 이데올로기
    http://www.mediamob.co.kr/vedder/7289.html
    http://www.mediamob.co.kr/vedder/post/tb.asp?PKId=7289

    기업으로 간 인류학자 1
    http://blog.naver.com/cliffrunner/40007310550
    http://blog.naver.com/tb/cliffrunner/40007310550

    기업으로간 인류학자 2
    http://blog.naver.com/cliffrunner/40007310987
    http://blog.naver.com/tb/cliffrunner/40007310987

    기업으로 간 인류학자 3
    http://blog.naver.com/cliffrunner/40007311232
    http://blog.naver.com/tb/cliffrunner/40007311232

    우상화된 할리 데이비슨
    http://www.mediamob.co.kr/pickyouup/216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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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판 색깔논쟁 (?)
    http://www.mediamob.co.kr/dechang/275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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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의 정치, 서사의 복원
    http://www.mediamob.co.kr/vedder/15408.html
    http://www.mediamob.co.kr/vedder/post/tb.asp?PKId=15408

    기독교인과 수구성
    http://www.mediamob.co.kr/vedder/178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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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vs. 홈페이지
    http://www.mediamob.co.kr/vedder/73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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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주의 vs. 이기주의
    http://www.mediamob.co.kr/vedder/13723.html
    http://www.mediamob.co.kr/vedder/post/tb.asp?PKId=13723

    언제나 Insider같지만 늘 Outsider인…
    http://www.mediamob.co.kr/sirius7/273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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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위로 생각해보는 언어와 사고의 연관성

    1.

    • 넌 생각 할 때는, 무슨 언어를 쓰는 데?
    • 걍 생각 하는데…?

    사고의 과정은 특정 언어 표현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는 다고 봅니다. 생각은 생각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할 경우에만 특정 언어를 사용, 그 때 그때 어휘와 문법의 적절한 조합을 사용, “표현” 하는 것이라는 것이라죠. 그런데 이걸 공감하지 못하는 아해들이 많더라구요. 혼잣말은 어떻게 하느냐.. 원래 생각이라는 것이 언어적이지 않더냐.. 등등. 그런데 이건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견해차이 같아서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았죠. 난 원래 생각을 말로 하질 않지만 아주 피곤하거나 힘들면 생각을 입으로 소리내서 하게 되거나 머릿속으로라도 일부러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고. 숙제를 해야 겠다라는 것이 “숙제를 해야 겠다” 라는 기표인가, 아니면 [숙제] 라는 물건의 해결을 봐야겠다는 [결심]과,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 등의 느낌의 결합 아니겠어요? 설마 [숙제]라는 단어 자체가 숙제의 뜻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겠죠. 특정 언어 환경이 아닌 이상 “하우스아우프가베”가 [숙제]가 될수가 없듯이. 그걸 생각 한 것이.. 십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이에 대한 입장이 많이 바뀌지 않았다면 존중해 줘야 되지 않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그것부터 물어보더군요).

    생각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니 말도 안된다, 와 반대의견이 팽팽하게 몇 분 맞섬. 아무래도 입장이 좁혀지질 않아서 연관이 있는 주제를 하나 빼어들었슴다.

    • 야 너는 자위 할 때.. 특정 여자를 염두에 두고 자위 하냐? 난 그런 건 상관 없거든?

    특정인을 생각하며 자위한다네요. 흠.. 자위는 섹스를 하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 보충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몸이 자극을 원하니까 되는 되로 자극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일까. 난 느낌을 받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만인데.. 얘네들은 더 구체적인 것을 필요로 하나보다. 웃긴 것은, 남성이 셋인데도 다들 동의했다는 것.. 여자 없이 어떻게 흥분하냐.. 이상한 놈이다… 옆에 앉은 여성동지가 하는 소리가, “다른 문화권들은 성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고 읽어 본적이 있어! 그래서 다름은 존중해줘야 해!”. 윽, 동지여, 그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구체적 대상 없이 자위가 안 된다는 놈들은 상상력 부족으로 치부하기로 했음.

    2.

    고딩 때 파멜라 안데슨 없이 자위가 안 된다는 이야기 말고도 충격을 받았던 이야기는.. 아해들은 보통 손으로 자위했다는

    아 참, 그렇게 필수적인 정보는 제 때에 공유해서 남에게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게 해야지, 끼리 끼리만 희희덕 거리니 우째 알수가 있나? 다 같이 모여서 딸딸이 치는 것두 아니고. 어떻게 알게 되었나 하면, 아해 둘이서 얘기를 하다가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것이 더 좋냐, 손바닥 전체를 사용하냐”를 듣고는 감을 잡았다는.

    몽정이란 것은 참으로 불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빨기도 애매하고, 가족에게 알리기도 난처한 사회적으로 미리 정의 되지 않은 그 아dd함. 한 많은 사춘기에 필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그 날 밤은 몽정에 시달리곤 했는데 이를 해결 하는 방법이 자위로 진을 빼놓는 방법이었고 손 없이 성공을 하려니 밤새도록, 서너시간은 거뜬히 끊임없이 잠옷을 벗고 등을 흔들고 배게로 마찰을 시켰다는. 그런 중노동 후에 오는 느낌은 타의 추종을 불허. 상기 노하우를 듣고 손을 써보니 상대적으로 너무 빨라 허탈했다는

    고로, 근대 헤테로 남성의 성해방은 아직도 손으로 하는, 구체적 대상을 상상하는, 등의 별의별 주류적 사회합의된 성적 놀이의 한계를 한 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죠. 기왕 할거면 내맘대로 하자구

    저기 상반 사진에 나온 왼손을 너무 뚫어지게는 보지 말라는.

    이거 읽고 삘받았다면 왠만하면 짬지닷컴사장님의 상품을 사용해 주자는.. 자본주의도 아는 사람끼리끼리 (트랙백 참조)

  • 자전거 낙마기

    작년 여름에 살던 집 그리고 금년 1월경 누군가가 훔쳐간 자전거 1호. 이야기에 나오는 자전거는 현재 갖고 있는 3호. 흰 콘돔처럼 보이는 것은 비 내릴 경우 의자가 젖지 말라고 싸매놓은 비닐봉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제발 창고에 갖혀있지만은 마라.

    난 자전거를 타고는 어딘가에 부딛혀 날라가는 감각이 참 탁월하다. 그게 아니면 통뼈가 굵은지도 모른다. 아님, 피가나고 살이 찢겨나가도 무뚝뚝한 사회적으로 정의된 마초의 역할을 잘 연기한다던가. 어쨋든 중요한 점은 차에 부딛히고 펑크가 나서 또는 도로의 큰 구멍에 자전거가 엉켜서 {자전거를 부둥켜안고/자전거에서 튕겨저 나와} 바닥을 굴러도 정작 몸을 말짱하다는 말씀이다.

    금년 구월 초, 밤 열시경에 일하는 곳을 나와 열심히 자전거를 달리고 있었다. 여긴 자전거 인프라가 나름대로 좋다. 전용 도로도 있고 웬만한 곳은 다 연결되는 자전거선.. 거길 타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중인데 문제는 암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는 것이다. 내가 검은색 가방을 쓰는 것이 이럴 때 문제가 된다. 헤드라이트 같은 것도 없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자고 싶어서 페달을 밟다보니, 세상에, 갑자기 오른쪽에 주차해있는 차에서 문이 덜컹 열리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악 할 시간도 없이 오른쪽 손잡이가 차 문에 걸리고, 자전거는 거기서 손잡이를 축으로 공회전하고 난 나가떨어졌다.. 튕겨저서 보도에 한바닥 굴렀던 것 같다. 보통은 책가방에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랬더라면 박살 날 번 했다.

    이럴 경우 가장 걱정되는 것이 상대편이 내가 심하게 다친 줄 알고 호들갑을 떨까 이다. 바로 일어서서 “어.. 나 괜찮소.. 다친 곳 없고. 그 쪽은 괜찮나? 허허 내가 오래 살다 보니 공중도 날아다니고..” 운전하던 사람은 어떤 여자인데 다른 남자랑 같이 차를 나와서 괜찮냐교 방방 뜨고 있다. “우린 괜찮고.. 날아가서 쳐박혔는데 우째 괜찮다는 말이에욧!” “음 제가 원래 이런 일에 익숙해서.. 요령이 생겼나 보죠 근데 전 자전거 손잡이 가지고 그 쪽 손가랍을 찌그러뜨리지 않나 싶었는데” “아뇨 괜찮아요”. “그럼 전 괜찮으니까 이만 봅시다.. 안녕~”

    집에 와서 보니 헬멧의 플라스틱 포장이 깨져 있었다. 오늘은 좀 강도가 심했군.

    그 밖에.. 자갈길에서 주르륵 미끄러셔 종아리와 허벅지에 피를 철철 흘리며 계속 시내로 달려서 여행사에서 비행기표 하나 예약 했던 것.. 아무래도 불쌍해 보이면 더 싸게 살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효과 없었음.

    또는 수업에 늦어서 자전거를 내달리다 길의 표면이 엇갈리는 곳에 바퀴가 끼여서 넘어진 일. 자신이 하도 한심하여 그대로 누워있자니 사람들이 중상인줄 알고 우르르 몰려옴.

    개코님의 “이 생경한 느낌…” 보곤 트랙백 할만하지 않을까 싶어 몇 자 써봄.

  • 친구들 모르게 스토킹 한다는 것

    친구들 모르게 스토킹 한다는 것이 왜 이리도 힘들다냐..
    thefacebook.com 과 구글에 아는 지식을 동원해 (아직도 50개가 넘는 이멜이 남아있다) 애들을 찾아보아도 딱 한 사람으로 좁혀지는 일이 없으니

  • [번역] Rachmaninoff. Escucha.

    원어 링크

    어느새 기다리고 있었다. 요동치는 연주회. 라흐마니노프.
    나지막하게 그리고 피에 범벅된 물들과 무너지는 지진들로 들으라.
    나지막하게 그리고 임박한 재앙에 도주하는 표범무리와 낮종일 잠 못이루며 들으라.
    사람들은 네가 영혼이 찢어진 채로 흘리는 눈물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막막한 바다와 하늘뿐이라; 오늘은 시선조차 없기 때문이다.
    두 개의 황혼 사이, 푸른 화염, 꽃이슬, 땀과 땔감의 흐름,
    공감되지 않은 움직임의 강 사이로 비는 오고.
    들으라. 강인한 바위, 금속적이며, 거인 치수의; 떨어지며
    구르며 시작도 끝도 없는 계단에서 텅텅 튕기는 것.
    구름 무리 (신성 눈물의 익명적 공범자)여, 들으라,
    불의 의식을 경축하라, 방앗간에서 떨어지는 물레,
    노래와 흐느끼는 힘으로 떨어진다는.
    유일한 사막, 남겨진 초원, 바람이 동맥을 자르며
    태풍이 몰래 무덤을 파는 그 곳의 희생 의식을 경축하라. 지하 강은
    뜀박질한다. 뱀 마냥 태울듯한 습도 부족을 휘저어 가며 다람쥐를
    위한 촉진제, 도마뱀 무리, 어두운 선인장이 수평선 없는 모래 언덕에
    흩어진다. 물레 밑으로는 강이 흐른다네.
    고문, 그리고 일시성 잿더미가 주야로 이어지고.
    라흐마니노프. 들으라.


    01.07.99

  • 즉홍적으로 미국 버스 이용기 트랙으로 탈바꿈..

    1. 당신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전철) 노선과 역은?

    21번은 계급/인종 선언이죠 ㅎㅎ. 21번 A/C, 84번, 그 밖에16번 7번 144번 등등.. 역은 당연히 일터와 기숙사. 그리고 시내. 전철은 노선이 하나 밖에 없슴다.

    2.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이용합니까?

    가끔 전철도 타니까.. 에스컬을 탑니다. 아무래도 늙어서

    3. 승강장에서 당신이 버스를 기다리는 위치는 어디 입니까?

    문이 하나 밖에 없음 –; 사족을 붙이자면 운전자들은 표시판을 약간 지나쳐서 멈추기 때문에 그 정도 위치에서 기다림

    4. 승강장은 아직 한산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습니다. 버스를 의자에 앉아 기다릴 수도 있고, 제일 앞쪽에 서서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몸이 힘들거나 아프지 않은 당신은 어떻게 기다리시나요?

    사람들이 모여 들지 않는 다면 난 절대, 섣불리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버스가 지나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지난 봄 노조 협상이 실패한 후 운전기사들은 시간을 악착같이 맞춰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더 받고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보이게 하며 있음. 사람이 많으면 대략 장땡 – 그들은 밖에서 눈보라 맞으며 기다리고 난 보일러도 구비된 대기실에서 책 몇 페이지 후다닥

    5. 버스를 타기 전 당신은 제발 앉아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나요?

    원래 많이 앉아서 갑니다. 무척 피곤한 경우, 제발 두 자리 다 비어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긴 합니더. 의자를 가로질러 앉아서 자기에 딱 좋죠. ^^

    6. 버스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때 당신의 시선은 주로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버스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 보면서.. 시간표와 시계의 시각을 대조해 본다. 왜 늦었는가에 대해 짐작해 본다. 또 늦을 것인가.. 운전사는 제발 도중에 내려서 오줌누러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다음… 버스 패스를 찾는다. -_-;;;

    7. 아무도 없는 버스입니다. 당신은 어느 자리에 앉는 것이 편안한가요?

    일찍 어두워지는 북부 특성상 아무리 많이 다녀본 길이라도 여기가 어딘지 감이 안 잡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되도록이면 앞줄에 앉는다. 운전사 사람이 좋아보이면 바로 옆에 앉아서 말을 붙여보기도 하구. 대게 첫줄은 졸다가 급정거시 코 깨질 가능성이 있으미 둘째 줄 또는 샛째 줄을 찾는다. 손잡이 기둥의 배열이 삐질 삐질 한 것을 감안해, 뒤로 고개를 젖혔을 경우 손잡이 기둥에 머리가 뉘일 자리를 찾는다.

    8. 자리가 있으나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만취해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주머니를 뒤져본다. 애인 사진이라도 있나? 야한 것이면 간직하고, 배꼽부터 위로만 나왔으면 깨워서 짐짓 떨어진 지갑을 돌려주는 듯 능청을 떤다. 깨면 자리를 확보한다.

    9. 이번에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역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주머니를 뒤져본다. 일부러 누더기 옷을 걸쳤나 의심부터 해본다.

    10. 앉아 있는 당신은 아무 것도 할 만한 게 없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사람들 수다 떠는 것을 경청한다. 여자들 수다 떠는 것 엿듣는 것은 재미있다… 특히 그 쪽에서 내가 못 알아들으리라 짐작하고 마구 얘기 보따리를 펴는 경우는 더더욱.

    11. 전철에서 할 무언가를 꼭 준비한다면 당신이 주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언가 읽을거리라면 어떤 종류의 읽을거리 입니까?

    버스는 많이 흔들림으로 책을 읽는데 지장이 있다. 일터에서 돌아갈 경우 신문을 준비해서 읽고, 갈 때는 자거나 나중에 쓸 페이퍼를 구상하는데 시간을 투자.

    12. 아쉽게도 자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앉아 있는 사람들 중 하나를 찜해서 웃으며 말을 건넨다. 잘만 버티고 있으면 나가면서 자리를 독점공급해준다.

    13. 떡을 이고 들어 온 할머니가 당신에게 다가와 (팔아달라고)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내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한국으로 돌아가시라고 정중히 말씀드린다. 내가 여행사 직원과 연줄이 없는 한 표 하나 사드릴 수도 없다.

    14. 아이가 도와달라는 내용이 적힌 종이를 능숙하게 돌립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나 자살하러 미시시피 강에 간다 라는 내용이 적힌 종이를 서툴게 내준다.

    15. 랩퍼들이 뒷좌석에서 앉아서 free-stylin’ 중이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이럴 때 영어가 젤 딸린다 –;

    16.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 놈 없다.

    18. 전날 밤이 잠이 부족해서 머리를 계속 긁는데 비듬이 떨어지는 것 같다. 뒷좌석의 눈총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당신의 대응은?

    뒤로 돌아보며 미안하다고 하고 씨익 웃어준다. 그런 후 머리를 살살 긁는다. 잠바 어께치에 떨어진 비듬을 손바닥으로 쓸어담아서 주머니에 넣는다.

    19. 옆자리에는 멋진 이성이 앉아 있는데 자리가 비좁아 자연스런 스킨쉽이 성사(?)되었습니다. 땀 흘리는 여름도 아니어서 불쾌하지 않고 피부든 옷이든 뽀송뽀송(?)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어디 가시냐고 물어본다.

    20. 옆자리에 앉은 멋진 이성이 졸면서 머리로 당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결국 편안하게 기대고 있습니다. 그가 결코 고의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머리를 제대로 세워 준다. 다시 내 방향으로 기대버린다면 옷/장갑등을 돌돌 말아서 베게를 해준다. (생머리로 남의 어깨에 기대면 높이의 영향으로 목에 무리가 많이 온다.)

    21.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이성이 별로 멋지지가 않습니다. 혹은 동성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멋지지 않은 사람의 친구들이 멋질 가능성은 높다. 전화번호를 물어본다. 잘 만 걸리면 파티에라도 초대 될수 있다. 그 때 가서 본전 건진다.

    22. (남성) 양쪽으로 자리가 있는데 한쪽에는 미인이 짧은 치마를 입고 앉아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어느 쪽에 앉겠습니까?

    옆에 가서 앉는다. 엉덩이를 밀착한다. 버스가 흔들리는 것을 포착, 치마를 문질러서 서서히 올라가게 한다. 반대쪽 남성의 눈빛을 자세히 관찰한다.

    23. (여성) 양쪽으로 자리가 있는데 한쪽에는 꽃미남이 얌전하게 앉아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어느 쪽에 앉겠습니까?

    옆에 가서 앉는다. 근데, 얘는 치마 안 입나? 반바지라도 입겠지? 엉덩이를 밀착한다. 지퍼 부분 돌기 형상의 변화를 예의 주시한다. 변화가 있으면 전화번호를 얻는다.

    24. 서 있는 사람은 없는데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아, 노약자석이 비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하십니까?

    노약자석에 앉는다.

    25. 막차를 탄 당신 앞에 술에 취해 정열적으로 키스를 하고 있는 연인이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따라서 같이 내린다.
    동향을 봐서 한 쪽을 슬쩍 한다.
    또는 길가는 행인과 맞바꾸치기 한다.

    26. 당신은 정말 피곤해서 잠들었는데 갑자기 어떤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이 싸가지가 없다는 둥 욕을 하시면서 냉큼 일어나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안타… 이곳엔 그런 게 없다. 가끔 중년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해드리는데 그 쪽이 참 미안해 한다.

    27. 앉아 있는 당신 갑자기 핸드폰이 울립니다. 당신은 전화를 어떻게 받으십니까?

    흥분해서 받는다. 반갑지 않더라도 반가운 척 한다. 전화가 끊긴 후 꼭 “뭐? 주소록이 지워졌다고? 내 전화번호 다시 줄까? xxx-xxxx이야. 응 안녕” 라는 대사를 꼭 넣는다.

    29. 특별히 기억에 남는 버스역이 있습니까? 있다면 사연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교회 가다가 브룩데일 역에서 버스를 하나 놓쳤을 때… 기온은 영하 25도인데 다음 버스는 50분이 더 있다가 온단다. 거긴 난로도 없었다. 아찔했다. 그 다음부턴 꼭 차를 타고 다녔다.

  • 개인 책임과 사회 책임

    성적이 죽을 쑤니 우울하고, 우울하니 친구들이 슬슬 피한다. 특히 이번 10월 학술회를 같이 계획하면서 친해진 애들이. 좀 걱정이 된다 – 혹시 친구들이 나 따라서 곤두박질 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것이야. 폭주하려면 혼자 폭주하시라. 그래, 이번 학기는 아무래도 뒤죽박죽이니 알아서 각개전투하고, 담학기 새 수업, 새 계절에 다시 만나자.

    근데 하나는 12월에 졸업하고 하나는 해외연수 간다. (마다가스카로 간다고 그랬던가? 좋겠다)

    음, 그래서 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부담되는 것이 제일 싫다. 부담 된다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난 개인 책임으로도 버겁다. 사회책임과 개인 책임이 서로 얽히면 좋은 면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건강에 안 좋을게다.

    그래서 여럿이 모여서 하는 수업 프로젝트도 감당 못한다. 그 엄청난 책임의 압박은.. 한번은 다섯명이 모여서 대여성 폭력에 대한 10분짜리 발표를 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서로 일을 하고 두번째로 모이기로 한 그 주말, 난 감기몸살설사를 앎았다. 그리고 미안해서, 연락도 안 했다. 세번째 모임에 나가니 조원이 쥑일락 말락 하면서, 이거 어떻게 책임 질래! 이런 놈이 어딨어! 하는 거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책임 질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어찌 어찌 해서 발표는 무사히 지나갔지만, 그때 엄청 화낸 조원은 결국 철학과로 옮겨갔고, 딴 학생는 아마 오늘 날 까지도 내가 아시아판 마초라서 과제를 안 한 줄로 알 고 있을 거다. 나중에 인권 수업에서 서로 마주쳤거든.

  • [번역]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번역 작업 사이트: w.yokim.net/ExposingWhiteness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한국어 번역]
    백인성을 들추어 내고 그리고 비백인 공간을 모색 하며
    데이빗 뢰디거

    I CAME FOR THE ART [korean translation]
    Exposing Whiteness and Imagining Nonwhite Spaces
    by David Roediger
    artpapers.org/feature_articles/feature1_whiteness_M_J_03.htm

    다음 글은 현재 라구나 예술관 [Laguna Art Musem] 에서 2003년 6월6일 까지 전시중인 “백인성, 먼길의 구조[A Wayward Construction]”의 카탈로그를 위한 데이빗 뢰디거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백인성의 정체성 정치역학과 문화이론을 모색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인 이 전시회는 세 부분 – “White Out [“백인은 나가라” 또는 “하얗게 닦았네”], “거울, 거울…” 그리고 “백인성의 회색화”로 나뉘었습니다. 뢰디거 교수님의 글은 이 중 두 번째 부분 [거울, 거울..]에 대한 입문입니다. 편집부는 이 글을 위해 도와주신 전시회 장 타일러 스톨링 [Tyler Stallings]님과 라구나 예술관의 스튜어트 바이어 [Stuart Byer]님 및 데이빗 뢰디거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 글은 라구나 예술관 (www.lagunaartmuseum.org) 협찬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예술 세계에 발을 담갔을 때에, 열 살이 채 안되는 소녀가 가장 인상적인 한 마디를 남겼다죠. 그때 참말로 얼마나 백인성이 유리하고 유리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내가 세인트 루이스 [Saint Louis] 시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자그마한 예술관에 연설하러 갔을때 말이죠.. 때는 Ron Sakolsky의 최신 모음집 “초현실주의적 반란들” [Surrealist Subversions] 의 기념이였고, 난 1929년에 있었던, 세상을 백인주의를 넘어서 보려던 초현실주의 시도에 대해서 짤막한 연설을 준비했더레요. 아무래도 Yves Tanguy 님이 그린 것 같은 이들의 주요 작품 중 하나는 대서양이 아니라 태평양이 중심인 세계지도였어요. 이 지도를 보고 우리 아이가 “그거 왜 그리 후졌냐” 그랬어요. Tanguy 는 미국과 영국을 축소해버리고선 오세아니아를 확대했어요. 제가 원래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 작품이 표현하는 세계를 바꾸지는 못했다면, 적어도 우리들이 얼마나 과잉개발된 백인 세상에 집착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할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존 훼오도로프, 사무실 무당, 2001, 여러 재료
    John Feodorov, Office Shaman, 2001, mixed media, variable dimensions (courtesy the artist).

    아무래도 이 이벤트가 동네 축제 [homecoming – 미국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매년 모여서 미식 축구 보는/하는 행사]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니 좀 더 연설을 개인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리 준비한 것은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예술관은 제가 자라난 동에 위치해 있었고, 동네의 여전함과 급진적 변화는 제 혀를 자극했지요. 여름철 무더위와 미시시피 강 특유의 습도,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밖에 나와서 빵 굽는 벽돌위에 있는 풍경도 너무나 친근했죠. 고기 굽는 냄새는 아직도 술 빗는 곳의 악취와 마구 섞이고. 한 때 백인 다수이고 당당하게도 분리주의자였던 이 지역은 많이 [인종적으로] 섞이게 되었구.. 바로 풍覺?서쪽에 있는 쇼핑구역은 생명력 뛰어난 라티노 거점을 형성했고, 흑인 가정들이 늘어나면서 앞뜰과 뒷마당에서 고기 구워먹는 것과 더위를 피하는 것도 더 사람다와졌더라구. 오랫동안 북/남을 기준으로 분리되어있던 도시는 이제 남쪽의 깐깐하기로 소문난 동네에서까지 인종적으로 섞인 골목들이 생겼더라고.

    예술관 내의 다양함도 그에 못지 않았어. 호화롭게 치장한 예술 애호가들과 동네 젊은이들이 꾸역 꾸역 몰려들고 연설자 목소리가 들리라고 선풍기를 고맙게도 (?) 꺼 주니.. 그 열기가. 난 어떻게 실생활이 인종의 어리석음과 폭력을 비웃고 몇몇 백인들이 사는 비백인 공간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리저리 회상을 내비쳤어. 연설이 끝나고 예술관 주인과 나는 바깥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며 동네가 얼마나 바뀌었는 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 주인은 다인종 주민들의 연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날 즐겁게 해주었어. 그리고 우리는 무너져가는 벽돌 건물에 도착했는데, 여긴 아마추어 역사가들이 옛날에 지하 철도 [underground railroad – 노예 제도 시대 흑인들을 북쪽으로 빼돌리는 연결망] 의 거점으로 사용‰榮募 것을 증명한 적이 있어. 요즘 이곳 운동가들은 개발자들과 싸움이 한창이야 – 개발자들은 땅 좀 치우고 건물 짓자고 난리지, 운동가들은 여길 역사 보존 지역으로 만들자고 하지.. 노예 시대의 성스러운 비백인 공간이 이십일세기의 비슷한 공간을 형성하는데 일조한 셈이야.

    이 날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그게 아니고. 우리가 예술관으로 돌아오면서 열한살 정도 될까 하는 African-American 소녀를 만났어. 그녀는 개막식에 참석했다가, 집에 잠깐 들르고는 다시 돌아와서 아직도 행사가 진행중인지를 알고 싶어했어. 그렇다고 말해주면서, 과자도 있으니 가서 음식이랑 과자랑 집어가라구 그래줬어. 그랬더니 얘가 뭐라는 줄 알어? “과자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아주 강경하게 말이야 – “난 예술 땜에 왔거든요”. 오호, 이 예술관은 졸지에 공동체 종합 예술 센타로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구나. 세인트 루이스의 가장 백인적인 공간 중 하나가 더 이상 그렇지 않고, 예술이 그 과정에 영향을 끼친 게야. [번역 주: 미국에서 예술은, 그것이 비싸던 대안이건 무료이건 저항 예술이던간에, 백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럼으로 인해 유색인의 대중적인 인식도 이에 제한되고]

    즐거움은 예술관 주인이 계속 얘기하면서 줄어들었지. 그의 말에 의하면, 도시 관리들은 유적이 지하 철도이건 아니건간에 싹 철거해 버리고 건물을 짓자는 대에 대해 아무 문제 의식을 못 느끼는 것 같았어. 아이러니 하게도 마약상, 포주와 창녀들을 성공적으로 다른 곳으로 보낸 다인종 연대는 그 값을 치뤄야만 했어. 자산 가치가 올라갔는데, 연대 구성원들은 집세를 내는 처지였어서, 갑자기 세가 세 배로 오르는 경험을 했지. 부동산 업자들은 이제 그 동네를 가까운 곳에 있는 분리주의 지역의 일부분인 것 처럼 소개를 했고, 재치료 매상은 폭락했구. 이 얘기를 들으며 전시회에 모인 위스콘신, 일리노이 및 미주리에서 부터 온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싼 전세를 원하는 예술가들이 가끔 “백인쪽으로 가는” 분리주의를 시작하는지에 대해 얘기를 했어. 어떤 이들은 다인종 동네 주민들에게 강도를 맞이하는 것이 콘도미니엄 개발자들을 맞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인 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산 가치를 일부러 낮춰버리면 (예를 들면 낙서 같은 전략) 그게 공동체 형성과 공존할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그 날 밤에 우리는 비백인 공간이란 것이 가능하면서도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에 대해서 배운것이야.

    수년 전 부터 기자들이 내게 던진 몇 가지 좋은 질문에 대해서 생각 해오고 있었다. 하나는 BBC 국제담당 기자가 생중계 인터뷰중 물어온 것인데, 좋은 의도를 가지고 백인다수인 청취자들에게 미국 백인성 비판적 연구의 핵심을 소개 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누가 미국에서 제일 백인스럽냐고 물어보았다. 망설이지 않고 “러쉬 림보 [Rush Limbaugh]”라고 대답하며 그가 흑인 구술 전통 [African-American speech] 중 minstrel show [노예 제도 시대 중 백인들이 얼굴에 검정을 칠하고 흑인 흉내를 내며 유희를 즐기던 연극 형태]와 유사한 점은 억제해 버린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게 왜 흥미로운 선택이냐 하면, 림보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희안하게도 표면상으로는 색깔 없는 것을 아주 대담한 인종 차별과 조합하기 때문이다. (1) 대답후 아차!, 하며 백인성을 보수주의, 남성성 및 의도적 인종 차별과 너무나도 가볍게 동일시 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빌 클린턴, 빌 게이트나 마돈나의 숨겨진 백인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마 백인 정체성이 문화 감각의 저 너머에서 정해진 기준과 스스로를 인종적으로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힘의 관계로서 작용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 더 도움이 ‰瑛만라.

    월스트릿 저널 기자에게서 받은 두번째 질문은 너무 친숙하고 명석했다. 우리는 내가 뭐라고 대답하던지 그의 기사는 학계의 백인론을 바보로 만들어 버릴 것이란 것에 대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일부러 비판적인 그의 질문 –“미국에서의 백인적 공간을 찾으실 수 있나요?” –의 이면에는 백인성과 예술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쓸만한 문제가 포함되어있다. 당시에 우리가 위치 해 있던 미네소타 주를 언급하려는 유혹에 잠깐 빠져들었다가 그 대신 미국 몰 [Mall of America – 미네소타에 위치한 쇼핑몰로 미국 최대 규모임] 을 골랐다. 넓은 의미로서의 백인성-도회지-소비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훨씬 더 직접적인 형태의 인종차별 – 저녁이 되면 보안 관리들을 동원해서 흑인 꼬마 아이들을 몰에서 못 들어오게 하려는 조치 – 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좀 의외로 나의 두번째 대답은 인터넷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경계선이 녹아 없어지는, 인종 없는 테크노피아로 여겨지지 않던가? 사실은 영원토록 백인의 영토였으면서 말이다. (인터넷에서 “다인종 [interracial]” 을 찾아보면 미국의 인종/성 관념을 재활용하는 수천개의 포르노 사이트가 뜬다)

    BBC와 월스트릿 기자의 질문에 대해 몇년간 생각 해 본 이후 이제 나는 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백인스러운 사람: 마르타 스튜어트 [Martha Stewart] (그녀의 복잡한 백인 배경은 현재 그녀의 주식시장 부정과 동시에 조사되고 있다) 와 에미넴 [Eminem]; 콜린 파월 (이 사람의 이름은 내가 어딜 가서 “누가 가장 백인스러울까요?” 하고 물어보든 빠지는 날이 없다) 와 로라 부시 [Laura Bush]; 건설 업계 쪽의 노조 지도자중 아무나,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톰 브로커 [Tom Brokaw]와 , 윌리엄스 동지와 마티나 힝기스의 태니스 시합이 있을 때마다 그걸 체육 대 지성의 대결이라고 왈왈거리는 테니스 해설자. 이제 백인적 공간을 함 볼까? 월 스트릿과 NASCAR 이벤트; 유색인들이 제외 되는 클럽장과, 그들을 가두는 슬럼가 [barrio]; 교육 기관과 주류 교회들; 백악관 [아니라는 광고에도 불구하고] 와 베네통 [Benetton] 가게; 국가 미식축구 협의회 경기장과, 거, The O’Reilly Factor [미국의 인기있는 토크쇼]를 주최하는 놈 – 그 놈의 양 귀 사이에 존재 하는 공간.

    이렇게 다양한 명단이 존재함으로, 백인성을 들추는 것은 복잡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작가 및 운동사 아모자 세개의 강 [Amoja Three Rivers]님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상, 백인성은 “정치 연합”의 형태를 지니고 발전하였다면, 이는 힘, 민족, 성정체성, 스탈, 종교, 나이 및 젠더등에서 각각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것이다.(2) 법학자 체릴 하리스 [Cheryl Harris] 가 백인성이 그 주인들을 모여주게 하는 소유의 일종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가 동시에 증명하는 것은 [인종적] 소유는 다른 형태의 소유를 아주 많이 가진 자들이 가장 아쉬워 하고 동시에 –비극적으로- 자신들이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여서 백인성에 그토록 매달리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3) (백인들에 의한) 백인종 내부에 존재하는 다름과 비합리성에 대한 투정은 표면상의 일치와 새로운 문제들을 동시에 야기하므로 백인성을 간단하고 한마디로 설명이 되는 듯이 축소해버리는 이론만 가지고는 더 이상 건설적이지 못하다. “그 누구도” –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가 그런 적이 있지- “한 가지 [정체성] 만 될수는 없다”.(4) Kavin Buck과 John Feodorov의 작품이 보여주듯 예술이란 것은 흑인 여성주의자들이 적절하게도 “정체성의 [다중]동시성”이라 부른 그 무엇을 제대로 조명할 수가 있다.(5)

    에밀리오 꾸에또, 가버려따, 2002, 유화, 84×60 인치 (예술가 및 Los Angeles, Newspace 예술관 협찬)
    Emilio Cueto, Gone, 2002, oil on canvas, 84 by 60 inches (courtesy of the artist and Newspace Gallery, Los Angeles).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백인성을 들추면서 더욱 더 복잡해지는 것은 “백인” 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의미하는지, 인종이 아닌 것 처럼 보여주는 때 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에밀리오 꾸에또의 날카롭고 거의 전체가 백색인 “가버려따” (2002)는 여러 겹의 의미를 괘뚫는다. 물론 인종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만, Piet Mondrian 같은 이들의 작품과도 일맥상통한다. Mondrian은 백색을 다른 전제 하에 사용하곤 그의 작품에 대한 [다른 이들의] 읽기는 거의 인종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꾸에또의 작품은 우리들에게 인종으로서의 백인성과 그 밖의 공백성, 부드러움, 비어있음, 차가움, 죽음, 순수, 자아 발견등등의 백인과 관련된 것들과의 연결점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그런 연결의 방향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헤르만 멜빌[Herman Melville]이 이미 백오십년 전에 제시한 모비 딕의 소설 속의 “고래의 백인성”, 그리고 “하녀들의 타르타러스 강” [The Tartarus of the Maids] 에 나오는, 차갑고도 천천히 죽어하는 공장 여자 노동자들의 백인성 – 꾸에또는 색상을 인종을 초월하는 기표로 사용하면서도 그 인종적 의미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질문은 아마 “가버려따” (제목 좀 보시라!) 가 묻는, 캔버스가 항상 백인적인 공간인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아니라고 선언했을때만 결국, 그리고 혹시는 그러한 후에도 항상 백인적인 공간인지 물음일 것이다. 순수히 물리만을 생각한 것이 아닌 사회 관계를 고려 했을 경우, 캔버스라는 것이 다양한 색상과 그림들을 취한 후에도 밑바닥은 백인적인 것인가? 할리우드의 회색 스크린 처럼, 끝끝내는 흰색이 되는 것인가?

    백인성을 들춰내는 일을 좀 더 배배꽈보자. Richard Lou와 Robert Sanchez의 “미친 인류학자들” [Los Anthropolocos – 인류학자 Anthropologos와 미친 이들 locos의 합성어] (1992)와 Mark Greenfield 의 흑인 연출 [blackface minstrelsy] 에 대한 단상은 참 골치스럽다. 적어도 백인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하다 – 또는 그 누구라도 미국 문화를 탐색하는 이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백인 우월주의가 주류 인종이념 뿐만 아니라 “건너도 되는” 인종선의 넓은 경계를 이미 오래 전 그려 놓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Susan Gubar 의 “인종갈아타기” [racechange] 에 대한 연구 결과를 재확인 시켜준다. “Ch.D.s” (“치카니즘 박사들” [Doctors of Chicanismo]) 으로 등장하는 Lou 와 Sanchez는 누가 [인종적 선을] 건너는 것이 허락 되는냐하는 문제, 그리고 누가 누구를 대표할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후기식민지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미친 인류학자들”은 불변하는 감각과 구조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Greenfield가 씹어대는 minstrel 연기자들은 결국 관객 앞에서 화장을 하거나 지우거나 (또는 흰 손을 보여주기 위해 장갑을 벗는 다거나) 를 할 것인지 결정 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서 그들의 백인성을 완전히 드러내고 아주 적절하게 인종 건너기의 과정 자체를 지배하는 것이 연극의 일부였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 아닌가?

    피터 에드룬드, 노예 주의 정부 새 (J.J.Audubon 다음), 2001, 유화, 40×28 인치 (예술가 협찬)
    Peter Edlund, State Birds of the Slave States (After J. J. Audubon), 2001, oil on canvas, 40 by 28 inches (courtesy the artist).

    역사를 재 구성 하는 것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부분은 최근 성숙해가는 노예 제도와 Jim Crow 제도 보상에 대한 논쟁의 관점에서 볼 때 크나큰 정치적 의미가 있다. Peter Edlund의 아름다운 “노예 주” 새의 형상화는, 이 새들이 십구세기 John James Audubon이 기획하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예술과 분류화 작업, 과학, 자연 그리고 (Audubon 의 관점에서) 다중인종의 일을 백인의 것인 마냥 지나친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합성은 다시 무엇이 “인종적”이며 무엇이 아닌 듯히 보이는 가에 대한 사색 그리고 백인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중요 지점에 묶여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힙합 시수로 “모든 노예의 이야기는 현재형 동사를 쓴다”(7) 라고 하는 The Coup [곡 이름] 처럼, Edlund 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Kelsey Fernkopf, La Brea Faberge, 1999, mixed media,17 by 5 by 7 inches (courtesy the artist and Howard House, Seattle).

    역사를 재 구성 하는 것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 부분은 최근 성숙해가는 노예 제도와 Jim Crow 제도 보상에 대한 논쟁의 관점에서 볼 때 크나큰 정치적 의미가 있다. Peter Edlund의 아름다운 “노예 주” 새의 형상화는, 이 새들이 십구세기 John James Audubon이 기획하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예술과 분류화 작업, 과학, 자연 그리고 (Audubon 의 관점에서) 다중인종의 일을 백인의 것인 마냥 지나친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합성은 다시 무엇이 “인종적”이며 무엇이 아닌 듯히 보이는 가에 대한 사색 그리고 백인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어느 중요 지점에 묶여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힙합 시수로 “모든 노예의 이야기는 현재형 동사를 쓴다”(7) 라고 하는 The Coup [곡 이름] 처럼, Edlund 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John Feodorov, Erika Rothenberg 또는 Kelsey Fernkopf 의 일련의 작품들은 백인성을 일부분 농으로, 일부분 심각하게 일상화된 소비의 객체 사이사이에 위치시킨다. Fernkopf는, 백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온갖 똥 더미들을 던져줌으로서 독특한 방식으로 문제 제기를하는 것이다. 백인성과, 행복을 살 수 있다는 거짓 약속간의 연결을 펌프질 함으로써, “안전”과 “깨끗함”이란 단어를 말함으로써, 그는 James Baldwin의 저서 “입장료” [The Price of the Ticket] 에 집대성되어 있는 백인성, 하루 일상과 윤리에 대한 분석심리학적인 방법을 취해서 인종과 항문성 [anality?] 및 자본주의에 대한 에세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8). 그런가 하면 Kavin Buck의 백인성, 헤테로성 [straightness] 그리고 진일보의 상호 연관은 초현실주의자 Franklin Rosemont 의 최근 주장인 예술가의 책임중 하는 백인을 몽상에서 깨워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9)

    본 전시회의 “White Out” 부분에 약간 망설여 지는 곳이 있다면, 이는 두 분야에 걸쳐 나타날 것이다. 첫째는 백인 여성들이 지배적 인종 지위를 소유함으로서 그들이 힘을 지니게 됨과 동시에 찬양됨과 이등시민 지위에서 “보호된” 과정을 모색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미 학계에는Ruth Frankenberg, bell hooks, Lewis Gordon, Ida B. Wells, Audre Lorde, Kate Manning, Vron Ware, Louise Newman 과 Cheryl Harris 에 의한 백인 여성과 인종에 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예술 분야에는 이에 해당하는 주장이 존재 하지 않는 것은 좀 안타깝다.

    문학 비평과 사회과학은 높은 기준을 가지고 백인성을 공포의 종류로 이야기 해 왔다. Ralph Ellison 과 James Baldwin 에서 부터 Leslie Marmon Silko, Paul Gilroy 와 Cherrie Moraga에 이르는 일련의 작가들은 백인성이 자신 자체를 유색인에게 대한 무자비한 폭력 – 채찍, Ku Klux Klan, 점령군, 흑인 처단군 [lynching party], 노예 초소 [slave patrol], 감옥 제도, “소수자” 동네와 인디언 지역에 버려지는 공업 독소등등 – 으로 그려냈다. 이들은 또한 백인 의식의 비틀어진 형성 과정에는 이러한 테러 행위를 보고 그리고 행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흑인 처단군들은 현장에서 서로를 축하하고 점심을 먹고 가족 단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늘날의 [미국] 테레비전 국가는 백인 경찰이 젊은 African-American 남자들을 때리는 장면들을 슬로 모션으로 끝없이 본다. 많은 African-American 들은 이러한 공격을 테러로 느끼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운전 면허증을, 어떻게 꺼내야 혼수 또는 죽음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친다. [번역 주: 주머니에 손 넣으면 안 된 다지요] 이런 주제가 등장하는 라디오 토크쇼에 전화하는 백인들은 이러한 폭력을 경찰관이 “피부색을 막론하고” 문제 있는 아이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문제쯤으로 보는 대에는 참 재주가 뛰어나다.

    하지만 어쩐 이유인지 백인의 테러는 전시회에 그리 크게 나오지 않았다. Andres Serrano의 Klansman 시리즈와 James Casebere의 섬짓한 작품들의 예외가 있었지만. Casebere는 백인적 공간들을 –그 중에는 유색인들이 묶여 있는 공간도 포함되어 있다- 모색하고 해체하며 의문을 제기하기 위하여 여러 대륙을 포괄한다. 그 만큼 시의 적절하게 백인성과 테러를 역사 및 초국가적으로 묘사한 작품도 없다. 이 전시회의 괘도를 통해 우리는 백인성을 해체하고 그 정체성에서 출발해 더 나은 무엇을 수면에 떠오르게 할 수 있다는 암시를 읽는다. 허나 Casebere의 유령 같은 그림들은, 그리고 그가 말하는 백인성과 테러의 상관관계, 그리고 소유와의 관계는 그와 같은 수면 부상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모색하게 될것인지에 대하여 따끔한 일침은 놓는다.

    케이빈 벅, 무너진 계단, 2001, 고무와 나무, 바닥 설치물

    Kavin Buck, Collapsed Staircase, 2001, rubber on wood, floor installation, 48 by 120 by 72 inches (photo by Antony Photography courtesy the artist and South La Brea Gallery, Inglewood, California).

    우리가 들추고자 하는 백인성이 겨우 개인적인 문제 또는 몰이해 / 나쁜 습관 이라면 별 고민 없이 감성적인 만남을 추구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단정해 버렸을 것이다. 허나 백인성은 개발자, 상사, 공해자, 경찰, 노동 조합 지도자, 단체 리더 또는 선생들 사이에서 인식되고 지켜지는 인식적 틀 [category]로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틀로써 백인성은 African-American 젊은이들이 백인 젊은이 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일곱 배나 높으면서 동시에 흑인 가족이 일 달러의 자산을 쥐고 있으면 백인 가족은 육 달러를 가지고 있는 구조를 지탱한다. 이러한 구조는 백인성 내부에서 나타나는 개인적 다름을 차단한다. 이 구조는, 인종적 차이의 이념을 강화하고, 백인성의 선호도를 높이며, 과학과 예술이 이러한 인종차별적 거짓들을 깔아 뭉개는 현실 속에서도 건재한다.

    백인 우월주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이러한 전시회 아래 모인 총체적 재능 그 자체로는 가능치 않다. 할수 있는 것은 관객에게 백인성의 역학과 “별다른 것으로 표시치 않은 경우 백인”인 사회에서 사는 부작용을 이해 할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백인성을 노출시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캔버스, 예술관 또는 국가가 항상 백인 위주일 것이라는 패배주의를 경계하는 것.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은 월스트립 저널 기자의 질문을 넓히며 어떻게 하면 비백인 공간들을 찾아내고 촉진할수 있을 까 하는 질문을 품는 쪽으로 우릴 밀어줄수가 있어요. 구조적인 불공정함이 항상 그런 공간을 없애버린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Notes
    1. David R. Roediger, “White Looks and Limbaugh’s Laugh,” in Colored White: Transcending the Racial Past (University of California, 2002): 44–54. See also the important recent collection edited by Kymberly N. Pinder, Race-ing Art History: Critical Readings in Race and Art History (Routledge, 2002).
    2. Amoja Three Rivers, Cultural Etiquette: A Guide for the Well-Intentioned (Market Wimmin, 1991): 8.
    3. Cheryl Harris, “Whiteness as Property,” Harvard Law Review 106 (June 1993): 1709–91.
    4. Edward Said in a question-and-answer session at Macalester College, Saint Paul in 1999.
    5. See, for example, Rose Brewer, “Theorizing Race, Class and Gender,” in Theorizing Black Feminisms: The Visionary Pragmatism of Black Women, ed. Abena Busia and Stanlie James (Routledge, 1993): 16.
    6. Susan Gubar, Racechanges: White Skin, Black Face in American Culture (Oxford University, 1997).
    7. Boots Riley, “Everythang,” from The Coup’s CD Party Music (Tommy Boy, 2001).
    8. Richard Dyer, White (Routledge, 1997): 75–76, speaks succinctly to the psychoanalytical literature.
    9. Franklin Rosemont, “Notes on Surrealism as a Revolution against Whiteness,” Race Traitor 9 (summer 1998): 29.

    데이빗 뢰디거 [DAVID ROEDIGER] 는 일리노이주 Urbana-Champaign 대학의 Babcock 역사 교수입니다. 최근 저서로는 “채색된 백인: 인종적 과거의 초월” 이 있음다. [Colored White: Transcending the Racial Past] (University of California, 2002). [주: 이 교수는 백인론을 학문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교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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